말씀과 은혜

창조와 구속의 관계성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6. 29. 11:16

창조와 구속

전통적으로 한국의 기독교, 특별히 복음주의적 기독교는 기독교 신학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창조와 구속중에, 일말의 정당성을 가지고 후자에 매우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전자에 관한 관심은 매우 최소한의 수준만을 유지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적 상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학적 경향성에 있어서 편의상, NCC를 중심으로한 신학적 흐름과 그에 대칭되는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로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미국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현저하다.

 신-칼빈주의(Kuyperian)적 입장에서 쓰여진, 최근에 출판된 한 개혁주의 교의학의 저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기독교 교회들에서, 두번째-신앙조항 [기독론을 지칭]에 대한 무게있는 강조가 첫번째-신앙조항 [신론을 지칭]에 관한 심각한 성찰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려는 열정적인 관심에 집중되자, 창조에 있어서의 성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근본적인 관심이 옆으로 쳐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

우리 인간의 죄된 운명, 그로부터의 돌이킴과 거룩해짐, 그리고 인간의 미래적 희 망등과 같은 것에 대해 성서가 부여하는 전반적인 중요성은 오직 창조시의 하나님의 사 역에 대해 확고하게 기반을 둔 헌신이 있을 때만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빛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경우, 최근에 들어와 창조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을뿐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연립성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창조론은 구속론에 비하면 그 정당한 평가와 무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창조에 대한 구속의 중심성을 강력하게 피력한 대표적 인물은 아마 20세기의 최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라 불리는 칼 바르트일 것이다.

 물론 그가 어느 정도 "창조 신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장엄한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은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그 중심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편, 성서신학, 특별히 신약신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예외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관한 연구는 많이 생산되었으나, 신약신학에서 창조신학에 대한 독자적 연구, 아니면 그것이 구속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개척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속과 선택, 그리고 역사에 대한 창조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성서 신학자들의 대세는 아마 저명한 구약신학자 폰 라드의 구속사 신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구약신학"의 기조에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Israel's Credo)이 있으며, 특별히 이스라엘의 애급으로부터의 구원전승은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을 구속자로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폰 라드에 있어서, 창조주 야웨에 대한 인식은 선택과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며, 이러한 구속주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식이 야웨를 창조주로 고백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구속에 대한 이해는 결국 창조를 구속의 한 부분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신학에 있어서의 소위 이러한 "창조의 일식 현상"(eclipse of creation)은 최근의 창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연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회복중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태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항상 구속과 더불어, 그리고 독자적으로 창조의 우선성과 그 중요성을 견지해 왔다.

 "창조자의 주권적 행위와 창조된 질서사이의 상관관계"라고 정의 될 수 있는 "창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우주(cosmos)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 질서 (cosmic order)와 법(law)과 역사(history) 이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전망을 제공해 준다.

특별히 창조와 관련하여, "창조질서," (creation order), "창조 규범"(creation ordinance), 혹은 약간의 뉴앙스는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같은 방향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 화란의 철학자 헤르만 도이비를트의 기독교 철학적 의미에서의 "우주법" (cosmonomos)은 우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규범과 그 행위들 전체를 지칭하는데,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위해 갖고 계신 근본적 도안과 계획을 말한다.

 이처럼 창조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신학의 시야를 좀더 보편적이며 우주적으로 넓혀줄 뿐만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전망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 이글은 류호준 교수님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포옹할때까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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