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정의:하나님의 집념 - 2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6. 29. 11:26

집념

 

이제 우리의 관심은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집념을 강렬하게 대변하고 있는 예언자들에게 집중된다. 특별히 예언서에서는 정의와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애착에 대한 예들이 수없이 발견된다.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 특별히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주제, 즉 공의와 정의가 신의 탐닉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충분하게 드러내 주는 풍부한 예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특별히 이사야적 전통들은 공의와 정의에 대한 강한 집념과 관심을 보여준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공의(    : 사 61:8)를 사랑한다.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시기를 작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강한 집착과 애정을 지니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도전과 무시는 곧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의미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공의와 정의에는 눈을 가리우면서 종교제의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다를 직설적으로 질타한다. 그들의 종교 행위는 허구요, 기만이며 신성 모독이라고 선언한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내 목전에서 너의 악업을 버리라.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사 1:13, 15-17)

다시금 이사야는 그의 유명한 "포도원의 노래"의 결론 부분에서도 매우 높은 강도의 질타와 비난을 수사학적 기교(언어의 유희)를 통하여 퍼붓는다:

대저 만군의 야웨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    )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악(    )이요 그들에게 의로움(    )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    )이었도다 (사 5:7)

선지자의 관점에서 볼 때 재난과 재앙, 그리고 심판은 야웨의 정의를 저버린 백성들이 수확하게 되는 열매들이었다.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특성인가를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거둘어 들일수 있는 소득이란 오직 불행과 재앙일 뿐이다. 이사야는 그의 백성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그들의 무지함 때문에 사로잡힐 것이라,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확장하여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 천한자는 굴복되고 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은 낮아질 것이로되 오직 만군의 야웨는 공평(    )때문에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심(    )때문에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그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요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 화 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들이여! (사 5:13-16)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집념과 집착은 곧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백성들에게는 오직 재앙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집착은 곧 백성들의 희망이요 소망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야웨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 기다리시며  너희를 긍휼히 여기시려 일어나시리니 대저 야웨는 공의(    )의 하나님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이사야서의 공의와 정의에 대한 강력한 전통은 다음과 같은 탄식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므로 공평(    )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    )가 우리에게서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도다 우리가 야웨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켜 포악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공평(    )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    )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려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사 59:9, 13-14)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여, 정의를 사랑하는 자, 곧 정의안에서 높이 들린 자이신 주님은 분명히 행동하실 것이라고 선지자는 경고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정의가 수립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정의를 행하기를 무시하는 일은 정의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제기하시는 주요 안건들 가운데 정의가 차지하는 중심성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집착과 관심은 특별히 예언서들에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모스는 불의에 대하여 격렬한 비난과 비판을 가하면서, 임박한 심판을 선언하시는 야웨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부르짖는 사자"(1:2)로 묘사하였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불의란 단순히 종교-제의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가 열거하는 불의의 목록표에는 소위 비종교적인 영역, 즉 사회-정치-경제-문화적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죄악들, 예를 들어, 착취, 학대, 부정, 압제, 부패, 차별 등을 포함하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러한 불의는 단순히 이스라엘에 의해 저질러진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 열국에 의해 저질러진 불의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우리의 논의의 중심점을 강화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대한 요구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이며 제한적이거나 한정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분의 정의는 이스라엘내의 질서뿐만 아니라 국제 질서, 좀더 더 나아가서 세계(창조)질서의 근간을 이룬다. 아모스의 가장 유명한 연설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결론을 짖고 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 5:24). 예언자 미가도 하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해 주고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웨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    )를 행하며 인자(   )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예레미야에도 이와 같은 어조가 나타난다.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의 요청에 의하여 소돔의 경건성을 추적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질문장면과 비슷한 상황이 예레미야서에 등장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찾는다. 즉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내리시려하는 진노와 심판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경건한 사람,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하늘로부터 인도해 올 수 있는 영성의 인물을 찾으려 돌아다니지만 그는 실패한다. 하나님의 눈에 비추이는 경건과 영성의 사람이란 곧 "정의(    )를 행하고 진실(     )을 추구하는 사람"이다(렘 5:1).

하나님은 정의에 집착하여 있다. 이러한 주장을 지원하기 위하여 더 이상 성서의 수많은 예들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명한 유대교 신학자인 아브라함 헤셀 (Abraham Heschel)은 그의 저서 예언자 (The Prophets)의 제 1권에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첫번째 요점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그는 정의의 중심성을 인류와의 하나님의 관계성에 결정적인 요소로 묘사하고 있다.

정의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포함하는 '행위', 즉 신적 필요이다. 정의는 그 분의 측량줄이며, 공의는 그 분의 잣대이다 (사 28:17). 정의는 그 분의 많은 길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정의는 그 분의 모든 길들 속에 있다. [정의는 인간] 의지와 경험에 독립적이며, 따라서 정의의 정당성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영원하다.

사람들은 정의롭고 공평한 것이 일종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이 명예와 보상을 그 대가로 받을 만한 덕이라고 생각한다. 공의를 행함으로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호의를 부여한다. 그러나 숨을 쉬는 습관 때문에 그 누구도 보상과 영예를 받지는 않는 것처럼, 정의도 호흡처럼 당연한 필요이며, 지속적인 직업이다.

이처럼 정의란 원천적으로 법, 질서, 규범의 영역에 속한다. 정의가 우주법이나 세계 질서, 창조 규범 등과 아무런 관련없이 독립적으로 논의된다면, 정의라는 단어는 열광주의자들이나 낭만주의자들의 구호가 될 것이다.

정의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위해, 우리의 방향을 잠시 바꾸어, 고전기의 헬라의 저자들에게 돌아 가보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익숙해 있는 분들이라면, 적어도 그들 작품들 안에 정의란 주제가 매우 중요하고 긴 논의의 대상임을 알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란 가장 중요한 최고의 덕이다.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고대 철학에서 한 전통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5권 전체를 정의에 할당하고 있다. 그는 정의를 우선 법률에 따르는 것 (          )과 평등 (       )으로 나눈다. 전자에서 법은 이상적인 법내지 그리이스 폴리스의 전통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법이 목표로 하는 바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제 5권 제 1장). 이러한 법은 모든 덕들을 전부 요구하기 때문에 법을 따름으로써의 정의는 덕의 일부가 아니라 덕 전체이고 이를 "보편적 정의" (iustitia universalis)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서 평등으로서의 정의는 덕들 중의 하난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수적 정의" (iustitia particularis)라고 부른다. 이러한 평등으로서의 정의는 다시 둘로 구분된다: "분배로서의 정의" (                    )와 "평등을 회복시키는 정의" (                   ) (제 5권 제 2장). 이상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도움을 얻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유형론적으로 정의의 측면과 그 기능에 관해 말할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의의 보편성이다. 둘째는 정의의 응보적 기능이며, 세째는 정의의 분배적 기능이다.

이제 다시 본 궤도로 돌아가, 정의에 관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려해 보자.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의 독특한 전망이 정의를 실현하고 구현하는 일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우리는 정의를 향한 관심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들과 관습들은 다른 고대 근동의 사회들의 법규들과 관습들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안전과 기회를 규정하고 보장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물론, 예를 들어, 아시리아의 법규들은 재산권 침해를 막기 위한 큰 관심과 배려가 반영되고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사회는 살인, 곡해, 매도, 공격, 구타, 착취, 인권 유린 등과 같은 행위들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일정한 양의 법들이 있다. 보관되고 전수된 법규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정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을 얻을 수 있으며, 이점에도 이스라엘이나 그 주변의 국가들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다른 이웃나라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분명히 정의가 시행되지 않거나 실패한 시기가 있었다. 어떠한 특정한 법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러한 법들이 금지하고 있는 불법들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반증해 주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8세기 및 7세기 선지자들에 관한 한, 민족의 삶에 심각한 위기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적절치 않은 법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반적인 권력구조가 심각하게 부패하였기 때문이었다. 부요한 자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종교적 권위자들의 지원아래 법을 전복시켜 자신들의 의지에 봉사하게 하였다. 가난한자와 힘이 없는 자는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거짓 증거, 뇌물, 특혜 등과 같은 것 때문에, 법원제도는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심지어 음성적 부정이 편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금, 법 제도와 법률체계가 깨어지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에서만 발생한 일은 아니었다. 고대의 다른 사회에서도 법들이 무시되고 부정이 만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고대의 다른 사회에서도 이러한 행위들을 정죄하였으며 그러한 잘못들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또한 정의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당대의 악들을 추궁하려는 비평가들의 등장 역시 단순히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특별한 공헌이 있었다면, 정의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었다. 즉 정의는 우주적 질서 체계의 본질이며 그것은 결코 독자적이거나 자율적이 아니다. 그들의 정의에 대한 인식은 야웨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창조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불의와 부정, 학대와 착취등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불행으로부터 구속되고 해방될 수 있는 근거와 기초는 인간의 자연적 의나 도덕 관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정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구속신학이 왜 창조 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시대에 만연되어 있었던 사회적 병폐와 악들을 향해 내 품었던 열정과 열기는 우리에게 지시적이고 교훈적이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추상적인 원리들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헤셀이 지적하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선하고 일이고, 훌륭한 목적이며 심지어 최상의 이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정이 얼마나 흉측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부정이 내 품어 대는 공포를 인식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었던 자들의 권리들을 변호하고 방어하는 일에 있어서 열정적이었으며 그러한 불의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공격을 계속하였다. 심지어 "구원적 미래에 대한 선포마져도 현재적 실패와 불행, 불의와 부정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부당한 행동들에 대해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실상 선지자들은 단순히 예민한 사회 비평가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흔히 반복되는 비난과 비판들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확신이 있었다: 즉 이스라엘의 보편적 삶은 미슈파트와 체덱, 즉 정의와 공의에 기반 위에 구성되고 질서가 잡혀야 하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절대적 관심이라는 확신이었다. 주님의 모든 길들과 방법들은 바로 이러한 정의와 공의의 약속과 규정아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주장이었다.

미슈파트와 체덱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세계질서의 근간이라면, 그것은 세계안의 모든 관계성을 결정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간의 관계성을 설정하는 규범이요 규칙이 정의와 공의속에 담겨져 있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정의와 공의의 실행자요, 구현자였으며, 그들의 왕은 그것들의 전달자요, 집행자였다. 그들은 모두 야웨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종들이었으나, 서로간에는 동반자들이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각 사람은 다른 동료 시민에 대해서 자유스러웠고 주님께 대해서는 종이었다. 각 사람들은 "야웨의 백성과 그의 땅 안에서 설 자리와 소명이 주어졌으며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역시 이스라엘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삶의 질은 하나님에 의해 수립된 관계성을 반영하도록 의도되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자유롭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존재였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의무들과 특권들을 지니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도들과 기구들 안에서, 정의는 시행되어야 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향한 주장의 빛 아래서 다른 사람을 대하여 행동하여야 했고, 특별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정의를 행하셨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했다. 하나님의 반복되는 구원, 보호, 인도 그리고 교정의 행동들은 하나님이 정의에 대해 강한 집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시지였다.

정말로, 예언자들의 열정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반복되는 고집스러운 주장,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행위들을 주님 앞에서의 그들의 규범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우리는 이제 무엇이 심각한 문제의 핵심인가를 볼 수 있게 된다. 즉 문제는 인간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헌신과 집념이다. 헤셀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 의는 단순히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삶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인간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도박이다.....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고, 사악한 것은 행하고, 약한 자를 학대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며 신에 대드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니 한 인간을 압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을 향한 그의 궁휼과 연민으로부터 나온다. 예언자들은 정의라고 부르는 절대적 원리 혹은 개념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백성과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관계성을 인식하는 일에 푹 취해 있었다. ........................ 불의의 행동이 정죄되는 것은 율법이 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인간에게 상처가 입혀지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형상은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그의 고뇌가 하나님의 가슴에 이르는 그러한 종류의 존재이다. '너는 그 어떠한 과부나 고아도 학대치 말라 만일 네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면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리니 내가 정녕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것이라... 만일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궁휼하기 때문이라'(출 22:22-23,27).

인간의 불의와 악함 때문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은 애정 때문에, 미슈파트와 체덱에 대한 그 분의 집착 때문에, 정의는 새롭게 기능하기 시작한다. 폴 틸리히가 제시한 것처럼, 이것은 "변혁시키는 정의 혹은 창조적인 정의"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창조적 정의는 "새롭게 연합하기 위하여 용서하는 신적 은총 안에서 표현된다. 하나님은 공로와 보상사이의 주어진 비례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는 창조적으로 그러한 비례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또 비례적 정의에 따르면 성취로부터 제외되어야할 사람들을 성취시키고 충만히 채우기 위하여 그렇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회복적 정의" 혹은 "종말론적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창조적 질서로서의 정의는 인간의 역사속에서, 특별히 인간 역사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기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는 이스라엘의 악함과 죄악들에 대해 반응하였고, 그 반응은 한편으로는 심판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복과 치료로 나타났다. 이러한 회복적 정의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궁휼(   )있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전통적으로 잘 알려진 정의들, 예를 들어 "보편적 정의," "응보적 정의" 그리고 "분배적 정의"등과 같은 정의는 성서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회복적 정의가 없이는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한 연구서가 잘 지적하듯이 "회복적 정의는 우리 모든 인류가 그것때문에 고통하는 그러한 모든 근본적 상처를 치유한다. 회복적 정의는 인간의 정의를 끊임없이 불의로 뒤 바뀌어 놓는 근본적인 상처, 곧 죄의 상처를 치유할수 있다...... 회복적 정의만이 죄를 극복하는 적극적 능력을 갖고 있다."

이사야서중 특별히 후반부인 40-55장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서의 회복적 사역이 특별히 두드러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소유하시려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며 이로 인해 열방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야웨의 고난받은 종"에 의해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열국을 위한 "야웨의 종"으로서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쉬운 임무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종이 그러한 사명을 다하는 노력에서 쉽게 물러서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그 종이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도 않을 것이다. 닫혀진 눈들이 열리게 될 것이며 갇힌 자들이 놓임을 얻게 될 것이다. 열국의 빛으로서, 정의가 수립될 것이다 (사 42:1-9). 하나님의 용서와 사죄에 기초를 둔 새로운 관계성이 세워질 것이며, 이러한 관계성안에서 정의와 공의가 편만하게 될 것이다 (사 51:1-8).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이 정의를 행함에 있어서 창조적이고, 회복적인 기능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이 부상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의를 행함에 있어서 새로운 길, 새로운 포괄적인 길이 보여 질 것이다. 정당함과 의로움들은 반드시 지탱되고 유지되나 불의와 불공정은 수정되고 고쳐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분배적인 정의와 응보적인 정의가 결코 무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신적 위엄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과 당당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정의를 성취하기 위하여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하여 기꺼이 상처입고 다치고 압제받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 (사 53:1-12).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이 아니며 그 분의 길은 우리들의 길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정의를 훨씬 넘어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한다.

이제 창조로부터 시작한 정의는 구속을 통한 회복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옛 언약 백성에게 이 회복적 정의는 곧 구속을 의미하였다. 신의 새로운 창조로까지 표현되는 이 구속을 통하여 그들은 새로운 세계속에 살수 있는 특권을 선물로, 은혜로 받았다. 하나님의 이같은 회복적 정의와 공의는, 분배적, 응보적 정의의 측면들처럼 하나님 자신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미 피조세계에 나타나 있으며, 동시에 미래에 나타날, 더 큰 의의 질서, 곧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질서에서 그 풍만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나 새 언약 백성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안에서 무슨 역할을 감당한단 말인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 홀베르다 교수는 설득력있게 이 문제를 우주적 질서로서의 하나님의 "의"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다소 길게 인용하더라도 독자들은 용납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언약적 의는 사적이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의이다. 왜냐하면 정의와 공의가 야웨의 보좌의 기초이며 인자와 신실됨이 계속적으로 야웨를 앞서서 나가기 때문이다 (시 89:14). 창조주이시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 인자와 진리 혹은 신실이란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 질서를 다스리고 있다..... 구약은 모든 사람들에게 규범이 되는 의의 우주적인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질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알려진바 되었으며, 이스라엘 됨의 특권은 곧 이 땅위에 심기운 하나님의 식목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식목됨은 하나님의 의의 표식으로, 창조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미래에 온전하게 들어날 것으로 기대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속사역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새로운 세계가 동터오기 시작한다. 회복이 온전하게 실현되어야 할 그러한 새로운 세계가 동터온 것이다. 미래는 이미 현재속에 도래하여 현존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선물(Gabe)인 동시에 임무(Aufgabe)이다.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새 언약 백성인 그리스도인 역시 "열방의 빛"(사 42:6; 49:6; 60:3)으로, 열국을 위한 "제사장의 족속"(출 19:6; 사 61:6; 벧전 2:9)으로, "의(   )의 나무"(사 61:3)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삶을 구체화해 왔던 하나님의 의가 모든 만국의 삶의 길로 구체화되도록 의도되었다는 구약의 확신은 지금도 계속해서 유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