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정의와 평화가 함께 포옹할 때까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6. 29. 11:33
공존

언제까지 우리는 그러한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한 시인의 노래속에 각인되어 있다:

궁휼(   )과 진리(   )가 같이 만나고 의(   )와 평화(    )가 서로 입맞추며
진리(   )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   )는 하늘에서 내려 올 때까지 (시 85:11-12, MT)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도래할 때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충만히 임할 때까지, 하늘과 땅이 조우할 때까지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 안에서 우리가 성취할 성공은 매우 상대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후퇴도 있을 것이고 좌절도 있을 것이며 역전도 있을 것이다. 냉소적이 되거나 무감각해질 유혹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의는 장터에서 매우 적은 호응도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호소력에는 한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우리 앞에 제시된 분명한 권고가 있다: 정의를 행하라! 물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이고 의견 역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의 목적, 즉 신적 명령에 의한 우리의 행동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정의는 에덴적 샬롬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임을 이미 이사야는 선포하였다. 그의 유명한 "이상적 메시야상" 연설은 이 사실을 잘 보여 준다.

A.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   )들로부터 한 가지가 결실할 것이라
B 야웨의 영이 그 위에 임하리니, 지혜와 분별의 영이요
 사려와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야웨 경외의 영이라
C 그의 즐거움은 야웨 경외에 있다
D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치(   )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결정(   )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공의로 궁핍한 자를 다스리며(   ), 정직으로 세상의 가난한 자를 변호할(   )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   )가 그의 허리띠가 되며, 성실(     )이 그의 허리줄이 될 것이라
E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으며, 어린 소년이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가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그들이 다치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왜냐하면 야웨의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물들이 바다를 덮음같이.
A' 그날이 올 터인데, 이새의 뿌리(   )가 있어 만민의 깃발로 설 것이다 그에게로 열방이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광이로다 (사 11:1-10)

이사야는 야웨의 신이 그 위에 임한 한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고 갈망한다. 비록 그 인물은 삼키운바 되고 베임을 당한바 된 그루터기에서 시작된(6:13) 보잘것없는 한 순, 연약한 한 싹에 지나지 않지만 (A), 그는 최종적으로 온 우주를 포함하는 거대한 산에 높이 휘날리는 깃발이 될 것이며, 그 깃발 아래로 열방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A').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다. 본문의 이러한 대 역전의 중심부에는 정의와 평화가 함께 손에 손을 맞잡고 놓여져 있다. 3-5절은 "정의 본문"(D)이라 부를 수 있고, 6-9절은 "평화 본문"(E)이다. 이사야에 의하면, 회화적 묘사로 에덴적 상황을 그리고 있는 후반부(E)는 정의와 공의에 대한 반복적 언급으로 불의와 불공평으로 가득찬 당시의 사회를 연상시키고 있는 전반부(D)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메시지는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샬롬의 나라는 곧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원래적 창조로의 회복은 오직 그 창조 질서의 골격이요 근간인 정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의가 파괴된 곳에 샬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통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받는 그곳에 진정한 샬롬이 가능하다. 이사야는 야웨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은사들을 소유하는 것이 왕권의 특질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야웨를 두려워함"이 왕권의 특질중의 특질이다. 이것은 왕권이 천상왕 야웨의 지상적 대리자임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자이다. 이러한 공의/정의의 문제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녕과 복리를 위하여 기초와 근간을 이루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즉 공의와 정의가 시행되고 그것들이 잠식되거나 무시되지 않는 사회에 비로서 평화, 샬롬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샬롬과 평화는 천상왕 야웨께서 지상의 그 백성들의 삶의 본질이 되도록 의도하였던 목표였고 상태였다. 이것은 악을 극복하고 불의를 정복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루이스 스미드는 하나님의 의와 샬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평화인 샬롬과 함께만이 온전해 진다. 샬롬은 기쁨, 활기찬 건강, 창조적 사랑, 삶의 희열안에서 폭발하는 솟구쳐 오르는 의다.

창조시에 인간이 놓여진 삼중적 관계성, 즉 하나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가 비틀어짐이 없이, 건강한 상태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그 관계성이 원래적으로 나아가려했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과 그 완성의 상태를 샬롬적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샬롬은 단순히 적대적 상황이 없다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단순히 올바른 관계성들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저명한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톨프는 말하기를, 일차적으로 "샬롬은 피조물들의 다중적인 존재방식을 위한 하나님의 법들이 순종되는, 책임성 있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샬롬은 그 최상의 의미에서 한 인간의 관계성들을 진정으로 누림이다...... 샬롬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즐겁게 누리는 것이며, 자신의 물리적 주변 환경 안에서 사는 것을 즐겁게 누리는 것이며, 자신의 동료인간과 함께 사는 것을 즐겁게 누리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삶을 즐겁게 누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의를 떠나 샬롬을 연상할 수 없듯이, 죄를 떠나 샬롬을 논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죄나 의, 불행이나 샬롬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부정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죄는 단순히 도덕-윤리적, 개인-사회적인 개념이 아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의 샬롬"을 어지럽히고 파괴하였던 파괴자이다. 죄는 평화로운 창조 질서, 정의로 구현되는 샬롬의 반달리즘이다. 죄의 문제는 이처럼 창조론적이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즉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종교적, 국제적, 우주적 차원에서 다양한 얼굴과 양태로 나타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론적-종말론적 샬롬의 반달리즘이다. 그러한 파괴가 있는 곳에 피조물들의 갈망과 탄식이 있다. 압제받는 자들의 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고통도 있고 약자의 눈물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눈물도 있다.

샬롬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안에 계시는 이유요 원인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소명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샬롬의 구현과 완성은 분명히 신의 선물이며,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은 그러한 선물의 실현을 위해 부르심은 입은 소명자요 사명자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야의 원형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의와 공의, 진실과 정직으로 백성들을 섬기는, 진정한 천상왕 야웨의 지상적 왕(사 11:1-10)이신 예수가 보여주었던 "섬김의 다스림"(마 20:25-28)을 본받아 따라가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샬롬 건설의 사역자들이다. 이 사실을 월터스톨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샬롬은 이 세상안의 하나님의 동기(cause)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소명(calling)이다.샬롬이 우리 역사속으로 충만하게 진입하는 것은 신의 선물이며 단순히 인간의 업적이아니다 할찌라도, 그리고 우리들의 삶속에 샬롬이 간헐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신의 선물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역해야 하고 힘써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샬롬이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서서 샬롬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기를 위해 존재하는 사역자들, 곧 그의 평화의 사역자들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의 사명이다. (The missio Dei is our mission).

샬롬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도래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들은 눈물로 씨앗들을 뿌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확실한 보증아래 소망한다: 반드시 기쁨으로 추수단을 거둘 때가 올 것이라고. 신앙의 확신이 있다면, 정의를 사랑하고, 샬롬을 주시는 의로운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이다. 우리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보증과 확증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언된 좋은 소식의 본체,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그 보증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 샬롬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맺는 말

우리는 어느 정도 매우 길게 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샬롬에 관하여 말하였다. 우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 결론들을 우리들의 토의를 중심으로 도출하여 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정의를 수립하려는 노력과 논의는 교회의 울타리를 훨씬 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이스라엘만이 정의에 관한 관심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이나 교회만이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독특하고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둘째, 정의가 주제가 되는 상황 아래서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겸손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정의를 통한 샬롬은 본질적으로 인간 노력의 결정체도 성취도 업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주어진 선물이다. 선물은 받는 것이지 버는 것이 아니다. 감사와 겸손의 양손으로 무릎꿇고 받아야한다. 이것은 정의를 실천한다는 명목아래 종종 오만과 독선, 자기 의로움으로 무장하고, 타인에 대해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우리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며 또한 배워야 한다. 겸손은 정의와 샬롬을 향한 우리의 실습의 기록안에 깊숙이 각인 되어야 한다.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의를 추구해야 할 독특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정의를 실현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의의 필수과목들이 종종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부인되거나 잊혀진바 되어 왔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권력을 남용하거나 정의의 주장들과 외침들을 외면하려는 유혹에 면역되어 오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들이다. 너무나 자주 교회는 고통 하는 절규들, 그것이 중남미에서든지, 우간다에서든지, 보스니아에서든지, 아니면 한국땅 그 어느 곳에서든지 상관없이, 그러한 고통의 소리들에 대해 귀가 먹어왔다. 교회들은 항상 현재의 상태에 만족해 왔으며 그렇게 하는 일이 심지어 교회 회중안에서 부유한 사람들이나 세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 예우를 해주는 정당치 못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 상태를 관행으로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의를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애정과 관심을 어느 정도 알았다면, 우리는 결코 정의가 단순히 사치스러운 이상이나 그럴듯한 삶의 목표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항상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즉 모든 사람을 향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근원적인 의도를 누가 감히 저버리고 던져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정의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정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정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네번째로, 성서에서 선포되고 있는 정의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관한 이해를 훨씬 압도하고 넘어선다,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회복하려는데 있다. 용서를 받고 공동체 속으로 회복된 사람들은 새로운 빛 아래서 정의를 행하라는 부르심에 접하게 될 것이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질서가 있는 공동체라는 틀 안에서 타인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 이상이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좀더 큰 정의가 작동하도록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한 관계성들을 변혁시키는 노력으로 더욱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안전과 권리 마져도 포기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놓으신 가치는 우리가 우리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갖고 있는 가치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 넘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생각하시고 가치 있게 기억하시는 지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증진될 때에 비로써 새로운 관계성들이 수립될 것이며 정의를 행하는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의는 궁극적으로 샬롬으로 그 꽃을 피운다. 정의가 아름다운 꽃으로 만개하도록 우리는 정원지기로 부르심을 받았다. 인류의 첫 조상이 실패하였던 인간의 소명과 사명, 즉 에덴 동산을 가꾸고 관리하고, "좋음"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정원지기의 소명은 다시금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참 인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사역으로 하나님의 동산에는 다시금 "좋음"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샬롬의 왕으로 오시고(사 9:6), 샬롬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요 14:27), 샬롬으로 축도하시고 승천하신(눅 24:50-53)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샬롬의 완성을 가지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심기운 하나님의 의의 나무로 우뚝 솟아, 세상안에 있지만 세상속에 속하지 않은, 정의의 구현 공동체로 기능하여야 한다. 그리고 소망속에서 의의 왕이시요 평화의 주인이신 그 분의 오심을 기대해야 한다. 그가 오실 때 창조와 구속이 입을 맞추고, 하늘과 땅이 손을 잡을 것이며, 정의와 평화가 함께 포옹할 것이다.

사도 요한과 함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그때에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실 것이며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것이다. 다시는 사망이 없을 것이며 애통하는 것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때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선언하신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그 분이 말씀하신다: "내가 속히 오리라" 우리가 응답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계 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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