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에 관한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는 신유가 구원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대속적 희생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병을 예수에게 넘기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그것을 제거할 때 질병 역시 제거되었다.
히브리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것은 영혼의 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죄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서 8:2,3은 죄 때문에 몸의 조화가 깨진 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병이다.
이사야 53:3∼5,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다음에 10절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여기에서 몸의 치료는 죄문제를 다루는데서 나오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죄문제와 병문제를 분리시키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병을 다루실 때 죄도 다루신다.
또한 죄 다루실 때는 병도 함께 다루신다. 서로 같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죄가 오기 전에는 병이 없었다.
죄는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의 법을 어겼으면 죄로 나타난다.
그리고 몸의 법은 병으로 나타난다.
신유에 대한 두번째 견해는 이렇다.
하나님은 은혜의 특별한 행위로 병을 고치신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병이 낫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는 믿음을 얻지 못한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셔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 주신 이들을 고치신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는 셈이다.
그렇게 믿는 이들 대다수가 병은 징계의 목적으로 준다고 여긴다.
징계가 안통할 때 병은 낫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병을 주신 분이 된다. 그리고 믿음이 없으면 병이 나을 수 없는데 그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게 된다.
이것은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병이 낫지 않는지를 감각적 지식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시편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이것이 요한복음 1:1∼4에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이 곧 예수이다.
즉 영원한 로고스이시다.
예수의 공적 사역에서 그의 사랑이 모든 곳에서 병자를 고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는 육신에 나타난 사랑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뜻이시다.
요한복음 4:31∼34,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말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렇다면 예수의 치유행위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아버지 뜻은 변함이 없다. 예수께서 땅에 계시던 동안 치유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예수의 치유행위는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아니, 그는 사랑이시고,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셨기에 병자를 고쳤다.
사랑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교제하게 하고 이 땅에서 그의 뜻을 수행하게 한 것처럼 오늘날도 병자를 고치도록 예수를 움직인 것은 사랑이었다.
우리가 예수와 교제하고 있다면 병자를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하셨던 그 일을 하고 싶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물어본다.
"만약 신유가 구원 속에 포함된다면 왜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더 자주 말하지 않았을까요?"
로마서 10:8∼11을 주목하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내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여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란 귀절을 보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함이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다.
새피조물은 예수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옛피조물은 사탄의 지배 하에 있다.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여기 "구원"이란 헬라어 "소조"는 복음서에서 모두 "고침"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치유의 조건은 이러하다.
첫째 예수를 주로 고백해야 한다.
둘째 마음으로 하나님이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변화했기에 이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사탄이 정복되고 질병이 제거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탄의 지배는 그쳤다.
이것을 믿으면 치유를 받는다. 마음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의가 되었음을 믿는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구원을 고백하는 것이다. 구원은 어떤 상태나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상태는 첫째 죄인이요
둘째는 병자이다.
영혼에건 육체에건 사탄이 영에 가져온 것은 치유되었다.
명확히 하자. 나음의 고백은 명령형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시인하면. . . 입으로 시인하여 (병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일을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이것은 두 고백이 나오는 명령이다.
첫째 예수께서 주되심의 고백이요,
둘째 구원받았음 또는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음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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