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복 - 시 73:1∼28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5. 18. 11:29


이 시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안믿는 악인들이 도리어 번영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자가 잠시 신앙상에 시험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신앙생활의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의 성소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남으로 시원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17절)
그래서 이 성도는 다시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1절에서 고백합니다. 이 시인이 깨달은 진리의 결론이 마지막 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는 내용인데, 먼저 1절에서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라"고 전제를 하고나서 그 동안 하나님을 안믿는 악인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세상에서 형통하여 잘 되는 것을 육안으로 보니까 적지않게 많은 회의와 시험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 영안이 열리게 되니 악인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소"는 어떤 곳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은 어디든지 다 계시는 분이신 줄 알고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특별히 성별된 성소나 성전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과 기도하며 영적으로 교제하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뵐 수 있었던 장소가 "하나님의 성소"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17절에서 이 시편을 토로하고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의 성소 밖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방황했다는 사실을 또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성소"인 공동체로 모이는 교회를 떠나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생활하게 되면 비록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노래한다 할지라도 점차적으로 신령한 세계를 귀하게 보는 관점에서 멀어지게 되고 보이는 세계를 화려하게 보는 관점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영적인 가치관에서 육적인 가치관으로 점점 떨어지게 됩니다. 육신적인 시각과 판단으로 보면 이 세상의 것들이 아주 좋은 것으로 크게 보이지만 영적인 시각과 판단으로 보면 이 세상의 것들은 절대적인 것들이 아니요, 영원한 것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7:29∼31에서 "이 세상의 물질을 많이 소유한 사람도 (물질이) 없는 자 같이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들은 잠시잠간동안 필요를 따라 사용하는 것들이요, 우리가 영원히 간직하고 누려야 될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영원한 가치에 주목하지 아니하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가치에 집착하게되면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인은 18절에서도 이 사실을 깨닫고 증거합니다. "주께서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사는 악인들이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들"에만 몰두하여 살도록 하시는 것은 저희들을 떨어질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하도록 내어 던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는 결국을 19절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의인에게 포악하고 교만했던 악인이 갑자기 황폐되었고 하나님께서 무섭게 심판하시는데 완전히 쓸어버리시는 심판의 결국을 보고서 의인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악인이 잠시잠간동안 누렸던 부귀영화와 안일하게 연락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허망함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성소" 밖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는 자칫 잘못 생각하고 판단하여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본문 2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소"밖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떠나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행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심이 아닙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또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이 세상을 감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망각하여 악인들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자가 어떻게 이 낮은 땅 위에 되어져가는 일을 알 수 있으며 또 관계할 수 있는가"(11절) 하면서 세상것들이 풍부함을 자랑하면서 패역한 입술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악독한 혀로써 도리어 의인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이 그 마음에 회의가 오고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하게 되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12∼14절까지에서 시인 자신이 불평하면서 느껴봤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분별할 수 있어야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은총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문화속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나 혹시는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에게도 세상 종말때까지 보편적으로 베푸시는 일반적인 세상의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은총은 반드시 하나님을 잘 믿어서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이나 공기와 햇빛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물질과 건강과 부귀영화, 명예, 권세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나 우상종교를 섬기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기억하고 명심해야 될 것은 이 세상의 가시적인 일반적 복들은 잠시동안 있다가 없어질 지푸라기 같은 복입니다. 물론 지푸라기 같은 이 세상의 가시적인 일반적 복들도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복들을 영원히 지녀야 될 특별은총과 같이 절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일반적인 복들을 지나치게 절대화시키고 그것에 집착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보다 우위에 두고 은혜의 가치를 전복시킬 때에 성도들을 진실로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러한 세상의 복들을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서 기억해야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악인은 영적으로 버리셨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육안으로는 잘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의인은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까닭에 고난과 징계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모든 사역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외적으로 보게 되면 악인은 아무 문제없이 "항상 편안하고 점점 부자가 되는"것처럼 보이게 되는 반면에 도리어 신자들은 억울하게 "매일 재앙을 당하며 매일 아침마다 징계와 채찍을 당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행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상을 조건적으로 먼저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보다 보상을 우위에 두는 "보상주의 신앙생활"이 됩니다. 가장 아름답고 좋은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나 상급보다 하나님 자신을 우선 순위에 두고 하나님 자신을 좋아하며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고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시인은 결국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본문 마지막절인 2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깨달음을 간증하고 있는 이 성도는 23∼28절까지 계속해서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시고 복 자체라고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절)라고 하면서 하나 자체가 좋다는 것입니다. 여기 23절을 주의하여 상고하면 이 신앙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한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또한 우리가 이에 응답하여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붙드심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와 함께 살기 위해서 예배실에 들어가야 하고 은밀한 기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만사의 되어져가는 일들을 주님께 아뢰고 의논할 때에 주께서 우리의 오른 손을 붙드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죄악많고 역경과 고난이 많은 이 세상일지라도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가 또한 하나님의 성소에 언제나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교훈(상담)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험악한 이 세상에서 사탄마귀와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영적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카운셀링을 우리는 항상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는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 생명의 말씀대로 인도함을 받는다면 우리가 육신적으로 죽은 다음에도 영원한 산 소망이 있으니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영원한 천국으로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접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간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곧 다가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될 행복은 본문 26절에서 신앙의 시인이 깨달은 것처럼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여도 하나님을 궁극적인 최고의 분깃으로 여기는 행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와 마음이 약하고 쇠잔할 때에 인생의 행복이 끝난줄 알고 낙심하여 좌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성도는 도리어 쇠약할 때에 반석되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영원한 분깃으로 영접하는 신령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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