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와 진리

금식에 대하여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6. 26. 10:15

사랑의 실천

 

다이어트(dieting)하는 것이 일상생활화 되고 있는 사회, 너무나도 풍요로운 사회, 잉여 곡물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회, 거리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음식점들, 소비적 삶의 유일한 낙이 되고 있는 사회, 전 국토가 음식점화가 되어 가는 사회… 이러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금식'(禁食, fasting)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구시대적 설교처럼 매우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영양과잉의 시대에서 다이어트가 이토록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퍼져 나가는 이유는 현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육체적인 건강, 외형적인 모습, 그리고 현세의 삶에 대하여 지극한 우선권과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이어트는 사실상 자기자신을 위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중심적인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다이어트입니다.

다이어트처럼 금식하는 일도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는 것을 거절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성경적인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살펴 볼 때, 금식은 다이어트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다이어트가 자아(自我)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면 금식은 동료 인간과 하나님의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를 위하는 것은 자연적인 성향입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금식하는 일보다는 다이어트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자기들의 삶의 스타일(life-style)을 단순화시키기 위하여 금식하는 사람들보다는 자기들의 몸무게를 염려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많게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상하게도 금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도 종종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간청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종종 금식을 통하여 사람은 자기가 갈망하는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금식은 잘 충족되고 풍요한 삶이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먹이려는 동기에서 시작되는 경우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살펴보면 성경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 두 가지 경우는 불완전하기도 하며 부적합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금식을 할 것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혹은 "한다면 왜 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와 이해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에서부터 나와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먼저 성경에서는 금식을 무어라 정의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윤리의 궁극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의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되고 실행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식과 기도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금식은 종종 슬픔과 비탄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쁜 왕이었던 아합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갖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비탄에 빠져 음식 먹기를 거절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통했던 다윗 왕도 자기의 충실한 부하인 아브넬이 살해되자 위대한 전사(戰士)를 잃어버린 슬픔에 빠져서 금식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미 구약시대에도 금식은 내면적 슬픔과 비탄을 외형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든지 경건치 못한 사람이든지 자기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식했던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흐르면 금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하시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심한 병에 걸려 고통하자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죽자 다윗은 일어나 음식을 먹은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이러한 이상한 행동에 대하여 의아해 했던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아기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는 아직도 기회가 있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하여 그분의 마음을 움직여 아기를 살려달라고 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아기가 죽었으니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식을 통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제 자기의 생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식은 죄의 고백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금식은 진정으로 통회(痛悔)하고 자복(自伏)하는 구체적인 증거였습니다(요엘 1:13). 이렇게 해서 '금식'은 '기도'와 연결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금식이란 '행동하는 기도'입니다. 마치 말과 행동이 한데 어울려지듯이 기도와 금식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모두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금식은 예배의 한 행위로서 매우 널리 실행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움직여 행동하시도록 하는 일은 실패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움직이도록 하는 시도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시도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사실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58:1-12).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금식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쾌락을 추구했으며, 서로 다투고 서로 싸움하였으며, 외형적으로는 금식을 하면서도 내면적인 금식은 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자기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압제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위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식은 자기 과시이며 자기 위장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은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이스라엘의 사회적 죄들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식이 실패하게 된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正義, justice)를 행하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아니라 그들의 이웃과의 관계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에 대하여 이사야는 생생한 언어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凶惡)의 결박을 풀어 주며 명에 속박(束縛)의 줄을 끊어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명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주며 유리(遊離)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은 궁핍과 곤고한 지경에 처한 자들에게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공급하여주는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라 할 수 있습니다.


금식과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 논쟁'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마 9:14-17). 자기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신랑의 친구들과 같아서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금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음껏 포식한다고 하셨습니다. 왕이 오시는데 어찌 금식해야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금식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倒來)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치집의 포식(飽食, feasting)은 메시아의 좋은 소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데려감을 당하게 될 때 금식하는 것이 더욱 적당할 것입니다. 금식을 통하여 제자들은 자기들의 슬픔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상대화시키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금식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맞추어 상대적으로 평가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금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일(마 6:33)에 공헌을 하는 정도에 따라 행해져야 하는가 아닌가가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정의'(God's Justice)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행전 13:3)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내기 전에 금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당시에는, 어떠한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땅한 방법으로 반응해야 하도록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금식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금식을 일반화 시켰으며 심지어 의무화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수단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내는데 필요한 공로(功勞)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금식이 공로가 되기 위하여 사람들은 육체를 낮추고 영혼을 높이어 소위 '영적(靈的)이신'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얻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금식은 16세기에 들어와 오직 은총의 복음만을 선언한 종교개혁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금식은 그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금식이 퇴조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반대했던 것은 그들의 오용 내지는 남용이었던 것이지 결코 금식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금식은 종교개혁 이후로 그 빛과 자리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금식은 이제 다시 교회에서 그 자리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금식은 그 본래의 의도대로 믿음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금식은 '사회정의'라는 측면에서 그 동기가 유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금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려는 행위이어야 합니다.


금식과 기근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도 풍요로운 빵 바구니가 있는 곳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금식의 문제에 대하여 도덕적인 결정들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최소한 일년에 한차례씩은 금식의 날을 정하는 것이 마땅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의 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사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이란 우리의 내면적인 관심을 진정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외형적인 형식으로 그친다면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동시에 굶주리는 동료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사야의 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금식은 마땅히 사회적 정의의 차원에서 인식되고 시행되어야 합니다. 금식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복리와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징표(sign)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보여진 사회정의 그 자체가 금식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금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요청하고 있는 것이 '의'(義, Righteousness)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식이야말로 과잉 영양 공급된 사람들과 사회가 그들의 과잉소비를 기꺼이 궁핍한 자들을 위하여 깎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길입니다. 무엇이라 해도 현재 우리들의 대부분은 부유합니다. 문자적으로 하루 세끼 걱정을 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적인 빈곤과 기근의 시대에 우리는 좀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폴 스콜텐보어(Paul G. Schortenboer)란 신학자가 간결하게 표현하였듯이, "그들이 단지 목숨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We must live more simply, that the poor may simply live)

금식은 곧 자기부인(自我否認)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자아 부인(自我否認)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절대 필요한 측면입니다. 아니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으로 금식은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금식은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는 징표이어야 하며 '생활방식'(life-style)이 갱신되었다는 싸인(sign)이어야 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잡았다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글은 천안대학교전문대학원 원장님이신 류호준 목사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