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와 진리

십계명의 윤리신학적 중요성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6. 23. 12:36

사랑해^^

 

C. 십계명의 윤리신학적 중요성: 지붕 위의 바이올리니스트

탁월한 문필가이며 윤리신학자인 루이스 스미스(Lewis B. Smedes)는 십계명의 후반부 계명들에 관한 탁월한 강해서에서 현대인들의 도덕적 감각에 대한 문제를 '지붕 위의 바이올리니스트'(Fiddler on the Roof)란 표상(表象, image)을 통해 제기한다. 독자들은 "Sunrise, Sunset"이란 제목의 음악으로 더 잘 알려진 '지붕 위의 바이올린 주자'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러시아의 어느 시골 유대인 마을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삼은 감동적인 영화이다. 영화 중 영화 제목을 그대로 재현하는 매우 인상적이고 상징적 장면이 나온다: 어떤 이름 모르는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 석양을 배경으로 한쪽 다리를 든 채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이다. 긴 연미복 차림의 초록색 코트를 입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경사가 급한 지붕 위에서 한쪽 다리로만 선 채로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그 영화 전체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집약해 놓은 회화적 언어이기도 하다.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켜 낼 수 있을 것인가? 위험천만한 상태에서도 어떻게 그처럼 감미로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풀어 가는 인생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지붕 위의 바이올린 켜는 그 사람은 우리들 모두일지도 모른다. 두 다리로 균형을 잡고 설 수 있는 평지를 상실한 채 깎아지른 듯한 지붕 위에서 한쪽 다리로만 선 채로 일상생활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우리네들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양 각색의 딸들을 가진 주인공 아버지 테베(Tevye)는 서막을 여는 그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우리 모두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지붕에서 떨어져 목을 부러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상쾌한 음악을 켜느라고 애쓰는 그런 사람이랍니다."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구요? "내가 말씀드리지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전통(tradition)입니다! '전통'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고 있는지 압니다!"

위의 표상적 예화를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위험천만한 삶의 현실 가운데서 삶의 균형을 잡고 살면서 의미있는 생명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고 무엇이 균형 잡힌 삶을 위한 기준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a. 균형 잡힌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균형 있고, 질서 있고 조화스럽게 운행되기를 원한다. 수많은 위험과 유혹의 순간들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락되고 오염된 세상이라는 것 역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유혹의 세상,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세상, 생명이 온전한 상태로 유지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세상, 적대적 세계이기도 하다.

위험한 지붕 위에서라도 균형을 잡으면서 잔잔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은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도 건강한 삶을 창출해 내면서 사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법이라 말할 수 있다. 죄와 오염, 타락과 위험 가운데서도 우리는 깨끗함, 온전함, 건강함을 원하지 않는가? 깨어진 에덴의 샬롬을 다시 회복하면서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죄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수없이 고백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개를 숙였던가? 아니 그것들을 경배한 것이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어 영생, 약속, 구원, 샬롬 등과 같은 것들에게 우리의 삶의 무게를 싣는다고 하면서도 가련하게도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얼마나 강한 집착을 보여 왔던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되다고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강변하면서 수많은 각종 우상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그분이 이름을 남용, 혹은 이용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삶의 진정한 안식을 추구하면서도 안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감히 남의 이야기로 돌려버릴 것인가? 통계학적 사고 방식에 깊이 물든 그리스도인들은 육일간 버는 돈보다는 칠일간 버는 돈의 액수가 분명히 많다고 확신하고 살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삶을 풍요하게 하는 날이 아니라 비참스러운 날일지도 모른다. '고르반'적 신앙 때문에 부모 봉양의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될 피치 못할 행운(?)으로 치부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안에 없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참조, 마가 7:9-13). '권위주의'에 의해 찌들어 본 경험을 핑계삼아 권위에 대한 부정을 합리화시키려는, 잘못 적용된 민주주의 주창자들은 신앙공동체 안에 없는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알면서도 사람의 '생명성'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 보지 못한 채로, 사람의 생명을 대치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유물론적 가치 체계가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에 없다고 부정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생명이 단순히 목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로되, 인간다운 삶을 부정하는 모든 행위들이 살인적 악마의 행위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성적 관계는 결혼과 가정 안에서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도덕관에 따라 간음을 단순히 '성적으로 활동적'(sexually active)인 행위로만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없는지? 순결과 정조는 이미 고어(古語)가 되어 버린지 오래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순결하고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가리켜, '언제부터 그렇게 성자가 되었느냐!'면서 비아냥대는 소리들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도덕적 부도를 내고 파산에 들어간(moral bankruptcy)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 속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매우 외롭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출발하는 온갖 종류의 절도 행위들로부터 면제받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나보다도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분노와 시기를 가져 보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역시 우리는 죄악의 씨들이요 가인적 피를 물려받은 아담의 자손들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진리를 굽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진실을 밝혀 주는데 앞장서 본 일이 있는지? 물론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상의 모든 계명에 있어서 독선주의자들이 될 것을 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들 모두 이러한 계명들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잇는 이유는 무엇일까?


b. 균형 잡힌 삶을 위하여 제시된 기준

우리는 고백한다, 삶의 구심점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의 첫 번째 질문과 응답은 이 사실을 감동적으로 표현해 준다: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잔잔하면서도 확신있게 답변한다: "사람과 죽음에 있어서 나는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부활절 신앙'(Easter faith)이다. 홍해의 이편에서 삶을 바라보듯이, 부활의 언덕 이편에서 삶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새로운 세계,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세계 속에 살면서 이 생을 바라다보는 새로운 인종(new humanity)이다. 비록 새로운 세계는 아직 충만히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차 오는 충만한 세계를 이미 지금 이곳에서 미리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부활의 눈을 통하여 장차 오는 세상을 미리 보고(시사회, 試寫會, preview)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관 안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있는 사람들이다. 샬롬의 맛을 미리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정사와 권세에 대해 능히 이길 수 있는 영적ㅗ도덕적 힘을 부활신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공급받고 있다(참조, 엡 6:12). 십계명은 단순히 개인적 영성을 세워 가는 지침만이 아니다. 신앙공동체의 경건과 삶을 형성하는 유일한 원리이며 사회를 변혁시키는 도덕적 힘이기도 하다.

당신은 누구를 섬기는가? 누가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가? 주일 아침마다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신이 드리는 신앙고백의 첫 번째 조항을 기억하는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는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당신은 또 다른 주인을 쳐다보는가? 왜 당신의 마음은 두 갈래로 갈리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알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까지 불린다는 사실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가? 야웨 경배자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간의 대결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주춤거리는 모습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왕상 18장).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신들의 도전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 왔다는 것이 성서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예배와 경배의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이다. 이것은 단순히 유일신 사상에 대한 천명이 아니라 실존적인 요청이다. 첫 번째 계명은 후속 계명들의 초석이요 근간으로, 구원받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가늠자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독점적인 관계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배타적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출애굽의 구원자로 드러내시려 하신다. 하나님의 요구는 결국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은총을 계속적으로 확장시키시려는 호의이다. 우리는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에게 독점적 사랑을 요구하시던 야웨 하나님의 말씀은 부활절 후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너는 이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17)라고 질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좋은 평행을 이룬다. 신앙공동체로서 교회는 감사와 보은의 마음으로 그분에게 '사랑'과 '충성'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계명을 두 개의 위대한 '사랑-계명'(love commendments)으로 축약시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 22:37-40; 막 12:29-31). 물론 많은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예수님의 위대한 두 계명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을 마치 십계명의 두 돌판에 상응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첫 네 가지 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으로, 나머지 여섯 계명들은 사람 사랑에 관한 계명으로 나누는 구분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이러한 구분은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그분에게 있어서 '위대한 계명'은 인간 삶의 전체 영역 안에서 인간 마음의 동기이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원리를 단순히 종교나 예배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주되심과 포괄적 왕권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 질서의 근간이요 기초인 야웨 하나님의 '주(主)되심'(Lordship)은 그의 백성 삶 전체를 요구하시고 계신다. 화란의 구약신학자 프리젠(Th. C. Vriezen)이 명쾌하게 지적하듯이, "십계명의 중요한 의미는 모든 삶의 영역을 야웨의 전적인 다스림 아래 놓았다는 점에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는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없어진다. 예수님의 위대한 두 계명은 인간 삶을 서로 분리되는 두개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상호보완적인(소위, 세속과 비세속의 영역) 삶 전체(whole life)를 언약의 주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성 있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 어느 때보다 성결(거룩)한 삶이 요구되는 이 때에, 그리고 그 어느 시기보다도 정의로운 사회가 요구되는 이 때에,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출 19:6; 신 14:2; 벧전 2:9), 이 세상 안에 의(義)의 나무로 심기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우주적이다. 언약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들과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들은 하나님의 샬롬이 온전히 실현될 때까지 그들이 율법의 수호자요 수행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은 십계명을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삶이다.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의 음악'을 만들기를 원하는가? 십계명을 연주하시오! 당신은 결코 당신의 청중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십계명에 대한 세개의 글은 류호준교수(천안대학교 기독전문대학원 원장)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