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 4:8은 인간이 "아가페"로 채워졌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의 생명과 그의 성품으로 충만한 신자의 몸을 상상해 보았는가?
골로새 2: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우리는 하나님 성품 곧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졌다.
요한 1:16,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다."
그의 풍성한 성품, 풍성한 생명을 우리가 모두 받았다.
우리가 그의 사랑 성품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매일의 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거한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지배한다. 사랑의 영역에 거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세상적인 삶에서 사랑의 영역에 거했던 것처럼 사랑 성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요일 4:17∼18)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삼키고 지배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되어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성품이 행동을 지배한다.
이 사랑성품이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한 사람을 영상화 해보라.
이른 아침의 두터운 안개가 우리의 옷과 모자에 스며들 듯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면 그의 사랑이 스며들어와 우리말을 통해 방울져 떨어질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는 사랑에 젖을 것이다.
요한일서 4:6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서 아느니라."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고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요일 4:7).
중생했는지의 시험은 사랑의 삶에 있다.
우리가 실제로 사랑에 의해서 잠기워 버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또한 생명에 잠긴 것이기도 하다.
생명은 곧 사랑이다. 이것이 가정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지 않은가. 말다툼이나 증오가 없다.
자녀들이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라는 것은 곧 천국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불친절하거나 아픈 비판을 받지 않는다.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이렇게 읽어보라.
"우리가 하나님 성품 곧 사랑의 생명을 받은 줄 아노라. 우리가 사랑의 가족 안에 있음을 안다. 그 풍성한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지배된다."
히브리 11:1∼3에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을 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지 사랑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믿음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속에 그의 성품을 받았으니 이 신앙도 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예수의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인 것이 된다. 예수는 신앙의 결핍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생명의 영역에 살았다. 그는 이 생명을 풍성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랑과 신앙을 풍성하게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야고보 1:22, 23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준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믿음 소망 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었다 (0) | 2004.06.17 |
---|---|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0) | 2004.06.17 |
[스크랩] 그럼에도 불구하고... (0) | 2004.06.16 |
[스크랩] 어머니와 우유한병 (0) | 2004.06.16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0) | 2004.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