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신라시대로 봅니다.
신라시대 때 중국에는 당나라가 있었는데 두 나라는 문물교환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나라에 전파되어 있던 기독교가 신라에도 전해졌다고 보는 것인데 당시 중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경교(景敎;Nestorian)라고 합니다.
그 증거로 숭실대 교수로 계시던 신학자 김양선 목사는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를 들었습니다. 그 돌십자가는 지금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입니다.
다음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일본의 가등청정이라는 장군이 천주교인으로 화란인 선교사 세스페데스와 동행하여 경남 창원지방에 와서 전도한 사실입니다.
다음은 19세기에 들어와 1832년에 화란선교회에서 파송받은 독일인 선교사 구츠라프가 중국선편을 이용하여 금강입구 연안에 들어와 40일동안 전도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과, 쪽복음을 나누어 주며 전도하였고 감자와 단추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중국에 선교사로 와 있던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북경근처에서 흰옷 입은 조선사람들에게 전도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서상륜이라는 사람에게 한국어를 배워 성경을 번역하여 복음을 전하였는데 서상륜은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 가서 복음을 이미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49년 7월 26일 평북 의주의 명문집안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7세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고아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25세 때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중병에 걸려 만주 우장에서 앓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 선교를 엿보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맥킨타이어를 만나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때 존 로스(John Russ) 선교사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상륜은 처음엔 어학선생을 하다가 나중에는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1881년 봄 서상륜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1883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을 가슴깊이 간직한 채 봉천을 떠나 이틀만에 고려문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소지품을 검사당하다 성경이 발견되어 구속당했다가 먼 친척의 도움으로 석방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숙이 사는 황해도 소래에 왔습니다. 당숙은 국가가 금하고 있는 성경을 그가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그의 끈질긴 설득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의 탄생이었습니다.
한국최초의 교회는 초가집 사랑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래지방에 김판서댁이 있었습니다. 그는 1년 소출이 만석이나 되는 만석지기였습니다. 그도 예수를 믿어 서당교회에 출석하였고 신앙을 갖게 된 양반과 상놈들은 서로 존대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서상륜은 예수 믿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존 로스(John Russ)목사의 추천을 받아 언더우드 목사님을 1887년 가을에 모시어 일곱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인의 손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그 후 김윤방(김판서)씨의 주선으로 예배당을 건립하였습니다.
다음 1866년 토마스목사(스코틀랜드인)는 미국상선을 타고 대동강에 올라와 평양에 전도하려고 했습니다. 그 배는 한국정부에 교역을 요청했다가 조선정부가 교역을 거부하고 배에 불을 질러 토마스 목사는 마가복음을 갖고 배에서 뛰어내려 전도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사형당했습니다. 그때 두 소년 서경조와 김성집이 마가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서경조는 목사가 되었고 김성집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인시체가 학질(말라리아)에 좋다는 말이 돌아 백성들이 토마스 목사의 시체를 서로 뜯어가는 바람에 외국에 조선족은 식인종이라는 소문이 돌아 그후 약 20년간 선교사의 발길이 끊어졌습니다.
1882년 조선은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굳게 닫고 있던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선교의 문도 열렸습니다. 외국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또 한사람, 이수정(1842-1886)씨가 일본에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한일수호조약(1876)이 체결되면서 무너진 그때 이수정은 고종황제의 도승지(비서실장)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정부에서 한국인 강사를 초빙하여 그가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1882년 8월 9일 박영호 사절단으로 일본을 방문할 때 동행하였다가 귀국을 하지 않고 머물렀습니다. 그때 그는 일본에서 농학박사 쓰다를 만났는데 그는 쓰다로부터 한문성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1883년 4월 9일 일본 목사 야스가와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금하는 국가에 한국의 고급관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정치생명의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를 받고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서상륜은 만주에서, 이수정은 일본에서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여 고향의 동생에게 1,000원을 송금받았는데 동생은 형님이 농업을 연구하는 줄 알았는데 성경을 번역한다고 하니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번역한 후, 1884년 일천부를 인쇄하여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한국에 올 때 이 성경을 가지고 왔습니다.
1984년 9월 20일 미국 북 장로교의 파송을 받고 의료 선교사 알렌(Allen)이 인천에 상륙하였고 그는 1885년 2월 고종황제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19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가 왔습니다.
1988년 기일선교사가 왔습니다.
1889년 호주장로교 선교사가 왔습니다.
1890년 성공회 선교사가 왔습니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왔습니다.
1896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가 왔습니다.
1898년 카나다 장로교회 선교사가 왔습니다.
한국에 계속해서 선교사가 들어올 때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중국에 왔던 네비우스 선교사는 전도방침을 주었습니다. 다음은 네비우스 선교사의 전도방침으로 한국교회가 채택한 것입니다.
1) 초신자는 자기 가족을 돌보며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개인전도에 힘써야 한다.
2) 교회의 여러 가지 계획과 기관은 한국교회가 감독하고 주관해야 한다.
3) 한국인 중에서 교역자를 세우고 사례금은 한국교회가 부담해야 한다.
4) 예배당 건축의 크고 작은 것은 형편에 따라 하되 교인들의 헌금으로 하게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한국교회는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 정책이 한국교회를 부흥성장시켰습니다. 한국교회는 1년 후 1886년 세례교인 3명, 1890년 세례교인 100명, 1907년 자립하는 교회수가 1,000개, 세례교인이 30,000명이었으며 전체 교인수는 12만명이었습니다. 1932년에는 선교회가 12개였고 선교사는 560명, 조선인 교역자는 2,359명, 교회 및 단체는 3,877개였고 세례교인 숫자는 227,645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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