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자녀가 누릴 권세를 사용하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5. 10. 10:14

우주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누릴 자신의 위치를 거부하는 신자가 많다.

한 가족 식구끼리 서로 돕지 않고 할 일도 하지 않는다 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들이 부탁할 때 돕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가족에서도 그렇다.

예수를 삼십년 가량 믿은 사람이 있다. 그동안 신앙의 성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떨어진다면 다른 이들이 짐을 져야 한다.

이런 사람은 항상 다른 이들의 도움을 찾지만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은 없다.
신자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권리를 알아야 한다.

요한일서 3:2,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한 번도 자녀의 위치를 찾아서 책임이나 권리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모르는 존재이다. 열심히 설교를 듣고 교회 일도 돕는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가진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자신이나 남을 돕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힘도 사용하지 못한다.
의란 아버지의 면전에 죄의식이나 열등의식 없이 설 수 있는 능력이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히브리 4:16의 초청을 들었다. 즉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필요한대로 도움과 자비를 받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그런 사람은 남들에게 간다. 아버지의 면전에 나아가는 것이 죄송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무엇인가 부족하기에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서 4:1은 그에게 해당된다.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것은 믿음의 안식이요 의의 안식이다. 나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가족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돌보신다.
요한복음 10:29,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모든 환경보다 크다는 사실을 모른다. 환경이 그를 지배한다. 귀신들과 그들의 일이 억누른다. 그는 죄와 결핍을 두려워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보다 크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조용한 안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께서 돌보심을 안다. 히브리서 7:25이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안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의 이러한 중보기도를 즐기지 못한다. 그 유익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한다. 조용히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주께서 살아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가 나를 붙들고 계신다."
그런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식이 없다. 히브리 4:11이 지적하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수 없기에 안식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설득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의의 열매가 없다. 그가 어떻게 하는가? 의의 첫 열매는 말씀에 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조용한 확신이다. 이사야 32:17,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것이 새피조물 안에 주어진 의의 열매에 대한 서곡이다. 그것은 화평이요 고요함이다. 확신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최고 형태이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걱정이나 불안은 없다.(시 23:1∼2)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뢰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환경이나 결핍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심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네게 더하리라.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서 찾은 사람이다. 그는 새피조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를 가졌다. 그 성품이 의를 주고 생명을 주어서 두려움 없는 고요 속에 거하게 한다. 히브리 5:12∼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여기 주목하라. "때가 오래므로." 얼마나 오래 동안 신자였던가? 얼마나 오래동안 영생을 누렸던가? 영생을 얻는 순간 말씀을 열심히 공부했어야 한다. 언제 위기가 와서 말씀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도 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에게 조용히 평안 속에 쉴 수 있는 영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그대로 임을 우리는 안다. 여러 일에 대한  말씀은 그것이 예수를 통해서건 바울이나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을 통해서건 모두가 액면 그대로 가치가 있음을 안다. 바울은 말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는 스스로가 복음이어야 한다. 전도자로 그치는게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곳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얻는 사람이다.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힘든 사람의 짐을 져주어야 한다.
이렇듯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힘이 없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들을 이끌어줄 힘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말씀의 원리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말씀의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애들이라서 우유나 먹일뿐이다.
기록된대로 행동하고 실천하였더라면 말씀은 그들의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약 1:22) 스스로 속고 있는 신자가 어떻게 군사가 될 수 있는가. 그런 사람도 믿기는 한다. 교회 오래 다니고 부흥회 참석하고 세례받고 직분 받았기에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모두 넘어지고 만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아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자신을 훈련하지 못했다. 우리의 신앙도 단련되지 않았다. 사랑을 사용하지도 말씀대로 사는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냥 떠돌아 다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