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토론

교과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4. 27. 15:29


이집트의 소학교에서는 읽기, 자연, 종교, 세 과목의 교과서를 무상으로 준다. 무상이기에 학년 말에는 되돌려 줄 의무를 지니며, 되돌린 교과서는 다음 학년 어린이들에게 물려진다. 읽기 교과서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등의 윤리적 색채가 농후하며 책을 더럽게 쓰는 사람은 머리가 나빠지고 책을 깨끗하게 쓰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진다는 대목도 있어 책을 소중히 하는 것을 떡잎부터 가르친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책에 모든 교과를 망라시키기에 교과서가 한 권이며, 역시 책 물림으로 보다 손때가 많이 묻은 교과서를 갖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있다 한다.
필리핀도 무료 배포인데 학기말에 반환해야 하고 교과서 깨끗이 쓰는 도덕 교육이 수반되어 학교에 따라서 책 깨끗이 쓰는 우등상도 마련하고 있다 한다.
미국에서는 무료 배포도 아니고 반환 의무도 없으나 자연스럽게 책 물림이 이뤄지고 있다. 대학은 말할 것 없고 고등학교에서도 다 배우고 난 책을 교내나 교문 앞에서 늘어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값싸게 파는 것이 풍속이 돼 있다.
뭐니뭐니해도 책 물림의 종주국은 우리 나라가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 옛 말에 책 동생, 책 아들, 책 손자 라는게 있었다. 책 물림으로 혈연을 맺는 지식혈연(知識血緣)의 호칭인 것이다.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다 배우고나면 `책떼기'라는 의식을 베푼다. 서당 상석에 떼고난 책과 떡을 빚어놓고 큰 절을 한다. 그리고 그 책을 특정의 후학에게 물려주는 책 물림 의식이 뒤따른다. 이로써 책 동생이 탄생하며, 책 돌림으로 맺어진 이 연분은 평생 계속된다. 과거에 급제한 기혼 선비가 미혼의 선비에게 책을 물리면 책 아들이 된다. 그래서 옛날 책 맨 뒷장을 보면 몇 대(代)씩 이어 내린 물림 족보가 적혀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책 할아버지 가운데 유명한 학자나 벼슬아치가 나오면 영광으로 삼고, 또 가문의 자랑으로 삼기까지 했던 것이다. 책장을 찢으면 피가 난다는 교훈도 이 책을 둔 의사혈연(擬似血緣)에서 비롯됐는지 모르겠다. 지식을 소중히 하는 싱그러운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이라고 책 물림의 큰 뜻을 못 살릴 리가 없는데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치솟는 교과서 값에 학부모가 쪼들리고 보니 더욱 이 전통이 돋보이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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