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토론

지옥의 꽃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4. 26. 11:29
존 스타인벡의 단편소설 <통조림 공장가(工場街)>는 수도 공사용 토관(土管) 속에 사는 한 가난한 가족 이야기다.
어느날 부인은 헝겊 조각을 주워다가 토관의 속 벽에다 커튼을 만들어 쳤다. 물론 토관에 창문이 있을 수는 없다. 없는 창에 친 그 커튼 아래서 해진 양말을 꿰매면서 부인은 등을 맞대고 있는 아들놈과 서로 행복을 확인한다. 남편은 창문도 없는데 커튼을 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빈정대지만, 그 같은 남편의 실용주의나 합리주의로는 따져질 수 없는 눈물겹지만 평화로운 인간미와 행복을 그 커튼 아래 소복하게 일궈놓고 있다.
편리할수록, 실용적일수록 좋고 선(善)이라는 현대인의 정신적 병폐에 대한 인간미의 반동(反動)을 실용적이지도 않고 편리하지도 않은 없는 창의 커튼으로 대변시키고 있다.
물만 부으면 꽃이 피어나는 비닐 컵 속의 즉석 꽃을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싹틔우고 잎을 돋게 하며 봉우리지게 하는 그 꽃 기르는 묘미를 거두절미, 꽃과의 인간 교류에서 인간미를 소외시켜 버린다.
슈퍼마켓에서는 즉석 매운탕도 판다. 갖은 양념이 돼 있기에 남비에 쏟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양념의 조절에 의한 개성이 있는 솜씨고 정성이고 입맛이고가 `편리할수록 선'이라는 현대 병에 희생되고 만다. 옛 어머니들은 같은 밥을 짓더라도 물의 분량, 솥 불의 강약으로 열 두 가지 밥맛을 달리할 수 있었다 던데, 전기밥솥이 밥맛에 스민 그 다양한 인간미를 앗아가 버렸다. 쇠우리 속에서 꼼짝 못하고 무정란(無精卵)만 낳아 대는 닭이며, 인간의 편리를 위해 식물로서 번식 능력을 약탈당한 가엾은 씨 없는 수박도 그렇다.
어제 그제 보도된 바로, 데니스 헌이라는 육종학자(育種學者)는 하필이면 `지옥의 꽃'이라는 기분나쁜 이름을 가진 풀을 무성 생식(無性 生殖)으로 성기능을 상실해 놓고도 참 편리한 세상이라고 좋아라 할 판이다. 차라리 토관 속 없는 창의 커튼 아래서 행복을 확인하고 사는 편이 한결 낫지 않을까 싶다.

'대화와 토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의 길수(吉數)  (0) 2004.04.26
철학하는 스타킹  (0) 2004.04.26
불경 속의 ET  (0) 2004.04.26
담 안 사람과 담 밖 사람  (0) 2004.04.26
식물성 음식이 동물성보다 좋은 이유  (0) 2004.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