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 테르툴리안(Tertullian)은 희랍, 로마시대의 문화적 전통에 살면서, 그 나름대로의 문화적 상황 안에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물었던 것이다. 그의 질문은 아주 간결한 것이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심오하고 복잡한 문제로 새삼 제기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게 있어서 아테네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었다. "예루살렘"이란 지명과 희랍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라는 지명을 대립시켜 놓고 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와 희랍, 로마 문화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다. 기독교신앙은 희랍, 로마의 문화적전통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테르툴리안의 입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아테네는 예루살렘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다"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희랍, 로마의 문화적 전통과는 독립된 것이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반 헬레니즘적이며, 믿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부조리이기 때문에, 합리성을 절대 기준으로 하는 희랍, 로마의 철학적 전통과는 대립되는 것이며,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신앙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즉 희랍로마의 전통에 부합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이었다.
서구 기독교의 역사 전체가 테르툴리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점철되었다 해도 지나친 관찰이 아닐 것이다. 서구 기독교 역사가 내린 답변은 모두 테르툴리안의 답변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테르툴리안의 답변과는 반대의 것이었다 하겠다. 예루살렘에게 있어서 아테네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실로 기독교 역사는 본질적으로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결함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적 합성의 과정에서 헬라적인 것과 유태적인 요소들 사이에 아무런 긴장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긴장과 대결은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테르툴리안의 입장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 문화의 역사는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대립과 결합의 우여곡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반문화
니이버(H. Richard Niebuhr)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바로 테르툴리안의 문제를 다루었다. 서구 기독교 역사안에서 기독교문화와 사상의 형성과정에서 있었던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관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리스도와 문화, 혹은 예루살렘과 아테네와의 관계의 첫째 유형은 역시 테르툴리안의 입장에서 표현되는 대립관계라 하겠다. 로마 교부 테르툴리안처럼 그리스도는 문화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이 둘은 혼합될 수도 없고 타협될 수도 없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다.
네로황제를 비롯하여 300년 동안 로마황제들은 기독교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박해의 역사는 초대 기독교회의 역사였다. 로마제국의 문화는 기독교를 배척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 역시 로마제국의 문화와 접촉을 가지면서도 그 문화와 대결하였고, 타협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제국의 문화에 적대적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 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관계는 하나의 기독교 전통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를 종교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단시하는 문화에서는 더욱 기독교는 문화와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 관계는 기독교가 서구 문화에 깊이 뿌리를 박고, 서구문화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중세에 이르러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탈세속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에서도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배타적이며 대립적 관계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문화권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도 이른바 그리스도와 기독교문화에 대립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독일에 있어서도 가능했던 것이다. 나치스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반기독교적 단체가 아니었으나, 본회퍼와 같은 신학자는 엄연히 그리스도와 기독교문화를 대립시키면서 나치스 문화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본회퍼가나치스 감옥에서 제창한 "기독교의 탈종교화"는 바로 기독교의 "탈문화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천주교와 이조왕조의 통치문화의 관계는 이 첫째 유형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래, 순교와 배교로 한국천주교의 역사는 점철되어 왔다. 이름 있는 교난만 해도 1791년의 가가, 1801년의 가가, 1827년의 가가, 그리고 1899년이후 6년동안 계속된 가까이 있었고, 수많은 한국천주교 교도와 외국 선교사들이 순교의 길을 갔던 것이다. 어떤 외국사람이 한국 천주교의 박해를 목격하고 한 말중 "고대 로마제국의 어떤 기독교인이 19세기 초반 70년간에 걸쳐 한국교인들이 겪은 것과 같은 시련과 형고를 겪었었는지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은 그 참상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의 박해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천주교는 반문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조왕조의 사상적 문화적 뿌리는 숭유사대였다. 종교적으로는 유교를 그 종교문화로 삼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숭유는 곧 척불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척불의 이유는 불교는 무부무군이라는 것이었다. 불교가 출가입산의 견성성불을 주창하니 출가함은 무부요, 입산하여 현실을 도피함은 무군이라는 것이다. 어버이와 임금을 마다하는 불교는 유교적 정치문화와 종교문화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신 최승로 때부터 이조왕조 오백년 동안의 통치 이데올로기였으니, 이러한 문화적 입장은 이퇴계에 이르러 정통 이념으로 더욱 경화되었다.
이조왕조가 천주교 기독교를 박해한 문화적 근거는 헌종의 척사윤음(1866년 8월)에도 밝혀져 있지만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은 불교의 가장 진부한 교설과 마찬가지이며, 사단오륜을 폐하고, 멸기난상함으로써 다 오랑캐요, 짐승들"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주교는 충효의 도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천주교의 교리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혹세무민하는 것이라고 공박하고, 나아가서 그것은 국기를 흔들어 놓은 것이라고 박해한다.
일제 통치하의 한국 개신교의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일제에 저항한 것도 있으나 문화적으로 일본제국주의적 문화통치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국의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더 강력하게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믿고, 개종한다는 것은 한국적인 것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이 쓴 기록을 보면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나오기 전에 반드시 집안의 귀신 단지들을 깨버리고 귀신 종이들을 불사르고 나왔다. 기독교 신앙과 무속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기독교인은 관혼상제에 있어서 "한국식"이 아닌 "기독교식"을 따라야 했다. 한국의 노래 가락이나 유풍을 따를 것이 아니라 "기독교식"을 따르고, "찬송가"를 불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기독교인이 제사를 드린다거나, 굿을 한다거나, 제사 떡이나 굿 떡을 먹는 것 조차도 "죄"가 되며 부정한 것이 된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한국의 기독교는 그 초기부터 가장 문화 배타적인 성격을 띈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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