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칭의에 대하여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10. 21. 10:26

칭의

 

 

 칭의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원되고 율법과 성령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함께 언급되며 인간의 삶 전체와 관련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정의를 내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신칭의를 다룰 때 다음과 같은 질문과 연관하여 논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가?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칭의론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종교개혁 운동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를 하나님의 행위 곧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의 義를 전달한 그런 행위로 이해했다.

이 사건을 인식하고 그것을 근본적인 신학적 가르침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이런 인식으로부터 교회와 신학을 위한 지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칭의론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 형태를 이루며 또 부분적으로는 변화되었는지, 이런 질문이 개신교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그 여러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되는 점은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개념으로서 특별한 결과에 의해 탁월하게 부각된다는 점이다.

마르틴 루터는 1533년 8월 26일에 시 130:4 곧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은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의 총체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비치는 "태양인데 그 이유는 교회는 이 가르침이 서면 서게되고 그것이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루터는 1536년 12월에 자기의 신학적인 유언에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대한 교의를 고백하고 난 다음, 소위 '소요리 문답서'를 썼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과 우리의 구원을 다루는 '첫째되고 중심되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 것은 믿어져야 하고 어떤 행위로도, 율법으로도 그리고 공로로도 얻어지거나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오직 믿음낭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은 자명하고 또 확실한 것이다. ......... 우리는 이 조항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다."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도 이와 매우 유사하게 낡은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과 황제에 대항하여 "아우구스타나의 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옹호했다.

 

"첫째 우리는 공로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표명한다.

둘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화해를 못하며 죄사함을 얻을 수 없음을 지키고, 가르치며 그리고 고백한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탁월한 이 항목(칭의론)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논쟁을 벌려왔다.

이 항목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분명하고 바르게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칭의론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보물과 그리스도를 바로 인식하는데 유일한 길을 제시한다.

즉 칭의론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유일한 관문이다.

이 항목이 없이는 불쌍한 그 어떤 양심도 지속적이며 확실한 위로를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을 인식할 수 없다."

 

위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또 이로 인해 상호관계가 폐쇄되어 버린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그 어떤 인간적인 공로도 없이 믿음의 자유함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복음은 복음적 신학의 핵심이다.

루터와 멜란히톤 그리고 그외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상호 의견을 달리하는 점도 있으나 칭의론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한다.

이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내용 곧 혁명을 일으키는 신학이념을 유포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성경의 촛점에,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성경적 증거의 소진점(消盡點)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루터는 소요리 문답서에서 '중심항목'(칭의론)을 설명할 때 롬 4:25; 요 1:29; 사 53:6; 롬 3:23-25을 언급하므로써 색다르게 표현했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믿음-조항'은(두드러진 의미에서 articulus; articulus fidei)은 절대적인 권위를 요구하는 그 무엇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조항은 계시된 지식을 내포하고 신적인 지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믿음조항'은 신학적인 지식의 "토대이다".

신학적인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결국 이 '믿음조항'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는 "조항(신앙고백서)"(Artikel)이라는 말은 공동적인 토론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믿음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며 이를 통해 교회의 일치를 확증하는 그 무엇이다.

 '믿음 조항'은 교회의 고백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고백서를 매번 새로이 그 경계선을 정하고 이 경계선 밖에서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곧 칭의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즉 은혜를 받고 또 은혜를 베푸는 죄인들의 공동체 이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이 말은 "믿음 조항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이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와 같은 문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신칭의는 교회가 존재하는데 필요한 기준이 된다.


칼빈은 칭의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轉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Inst III,11,2)라고 했다.

그는 자기의 칭의론을 기독교강요 III, 11-13에서 장구하게 열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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