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마 11:25∼30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6. 8. 10:29

주영

 

사진설명 : 저희 가정의 큰아들 김주영입니다.

           어렸을땐 너무 잘생겨서 영화배우로 키울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되더니 무척이나 어른스러워(?) 졌습니다.

            마음이 너무 여리고...동생들한테 너무 양보를 많이 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인간은 참으로 괴로운 인생이 되었다.
고통, 고난, 억압, 가난, 질병,
굶주림, 미움, 전쟁, 증오, 불화,
탈락, 패배, 불안, 공포, 근심, 걱정...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우리 인생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종류가 그 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전 2:23, 4:1)고 하였다.
오늘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신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적하신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류의 비참하고 불쌍한 상태를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8∼30)

오늘 우리 모든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들이다.
1) 하나님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지친 사람
2) 선해지려고 노력하다가 절망에 빠진 사람
3) 자기의 사명을 찾으려다가 지치고 실망한 사람
4)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통하여 괴로워하는 사람
5) 죄로 인하여 불안하고, 심판의 진노 아래서 두려워하는 사람

모든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 누구도 "내게로 오라"고 초청해 주는 자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셨다.

인도의 '싼다싱'은 불교인으로서 예수를 반대하였다.
그는 18세까지 많은 불경을 공부하고 여러 수도사도 만나보았으나, 마음은 고민과 번뇌를 해결하지 못해 이제 자살 직전에 있었다.
그는 그때에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새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에 예수를 믿어 마침내 성자가 되었다.
그의 가정은 부요하였고, 지위도 높은 가문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지식도 많았고, 몸도 튼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 있었던 것이다.

외모로는 수고가 없고, 짐이 없는 것 같지만 수고와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신의 짐,
정신적인 짐,
그리고 심령의 짐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세상 일에 시달려 안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피곤한 인생을 무거운 짐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초청의 말씀이 본문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머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쉴 때만이 참 안식이 있다"고 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고, 기쁨과 평안이 있다.
다른 어떤 것도 인생에게 참 안식과 평강을 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안식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놀라운 초대는 오늘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1)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는 많은 무리들과,
2) 예수님을 따른 소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는 많은 무리들 가운데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은 사람은 소수였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으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병이 나은 사람도 많고, 떡을 얻어먹은 사람도 많았지만 참으로 배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 소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그 삶을 배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였으나 제자들은 멍에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의 멍에를 배우는 자만이 예수님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 땅에는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를 때 소나 나귀가 멍에를 메고 짐을 날랐다. 대개 두 마리 이상의 소나 나귀가 한 멍에를 메고 짐을 지거나 밭을 갈았다. 그런데 그 멍에를 멨을 때 힘센 소 한 마리가 있으면 그 옆에 있는 짐승은 수월하게 갈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멍에를 메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그 멍에 안에 들어오면 멍에는 쉽고, 그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고하고 애쓰는 인간을 부르시는 초대이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초대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적인 초청이며,
주님만이 책임질 수 있는 절대적인 보장이다.

인간의 수고하는 무거운 짐은 하나님을 떠난 범죄에서부터 왔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사죄의 길이 있고, 진정한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3).

오늘 우리에게는 벗어버려야 할 멍에가 있다.
이 멍에는 메어서는 안되는 멍에이며,
메고 있다면 벗어 버려야 할 멍에이다.
이 멍에는 메고가면 갈수록 더욱더 무거워지는 멍에이며, 결국 죽음을 초래하는 멍에이다.
이 멍에가 곧 죄의 멍에요 종의 멍에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같이 불의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후 6:14).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유하고,
무거운 죄의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시기를 원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꺽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라"(렘 30:8)
이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다.
죤 번연이 옥중에서 쓴 "천로역정"이란 책에 보면 기독교인이 장망성을 등지고 천성을 향해 탈출할 때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며 수렁에 빠지며 나아갔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이르러서야 그 짐보따리가 벗겨져 멀리 도망쳐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메어야 할 멍에가 있다.
이 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새로운 멍에이다.
이 멍에를 메기 위하여서는 죄의 멍에를 벗어 버려야만 한다.
이 멍에는 반드시 메어야 할 멍에이며,
메고 가면 갈수록 생이 가벼워지며,
메고 가면 영원히 사는 멍에이다.
때문에 "사람이 젊었을 때에 이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애 3:27)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 멍에를 짐이 아니라 축복으로 믿고, 은혜로 말미암아 충성하게 되었다고 감사했다.

오늘 우리가 메야 할 이 멍에는 십자가형의 멍에로, 한 멍에 아래 두 마리의 우마가 끌고 가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져야 할 멍에를 의미한다.
때문에 사실상 우리는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생은 가벼워지고 쉼을 얻게 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멍에는 짐이 아니라 날을 수있는 날개가 된다"고 했다.
주님의 멍에는 영혼의 날개이다.
우주선이 육중한 부속 캡슐을 싣고 올라가다가 1단·2단·3단으로 대기권을 벗어 올라가면서 점점 가벼워지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의 캡슐도 저 높은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면 갈수록 멍에는 가벼워지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 고해같은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오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인생고(人生苦)·사고인난(四苦人難)… 등 모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부르시는 말씀이다.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 전부를 다 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생활난에 울고, 질병에 울고, 사별(死別)로, 고독으로, 실망으로 우는 사람을 누구든지 다 부르신다.
또한 짐진 사람, 심령의 짐, 곧 죄의 짐, 비애의 짐, 염려의 짐, 양심의 가책의 무거운 짐, 이런 짐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오라고 부르신다.
심지어 타 종교의 의식적인 무거운 멍에를 메고 허덕이는 종교인들까지도 부르신다.
요컨대 이 세상의 모든 불행에 우는 인간은 누구나 다 오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의 초청에 응해야 한다.
그리하면 불행이 형통으로 바꾸어 질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 그의 명령에 움직이기만 하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 자의 형편과 환경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7절에 보면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 그의 지시대로 행하므로 두 배에 채우는 많은 고기를 잡았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5장 5절에 보면 38년간 걸어 보지도 못했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명령에 행동을 함으로 고침을 받았다.
이와 같이 사업이 잘 아니 되는 자가 주님에 초청에 응하고 그의 지시대로 살면, 하는 사업이 번창케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부름에 순응해야 한다.
질병의 고통이 없어질 것이다.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눅 19:1∼10)는 주님이 "내려오라"고 하신 명령을 따라 행동함으로 저의 죄가 용서를 받는가 하면, 그의 가정 식구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영과 육의 구원을 받는 길은 주님의 오라고 하시는 음성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쉽다'는 말은 '꼭 맞는다'는 말이다.
멍에가 꼭 맞으면 일하기가 쉽다.
멍에가 꼭 맞으면 짐이 가볍다.
그러나 멍에가 안 맞으면 짐은 더 무거워진다.
세상을 사는 중에는 부부간이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서로 맞지 않는 것 때문에 갈등하고 불편해 한다.
하지만 어떤 환경이나 형편이나 처지에 있든지 꼭 맞는 멍에가 있다.
바로 십자가의 멍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를 멘 사람은 모든 것이 꼭 맞게된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면 어떤 환난이나·곤고나·핍박이나·궁핍 등 그 어떠한 형편에서도 편안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감옥이 꼭 맞았다.
그는 그곳에서 찬송을 불렀다.
많은 죄수들은 괴로워서 탄식하는데 그는 찬송을 불렀다.
감옥 속에서도 꼭 맞았다는 것이다.
왜 그래쓴가? 바로 십자가의 멍에를 메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멍에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멍에는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꼭 맞는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짐으로 온 인류에게 꼭 맞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꼭 맞아 세상을 구원하셨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교회에 지고 왔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주일 지켜라,
기도해라,
십일조 바쳐라…' 등등 무거운 멍에를 지웠다.
사람들에게 신앙은 더욱 무거운 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 멍에를 움직여라"

이는 "신앙의 날개를 주었으니 날개를 움직여 날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기도를 배워야 한다.
말씀을 배워야 한다.
순종과 섬김을 배워야 한다.
그때 신앙의 멍에는 쉽고 모든 짐이 가벼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쉽고 가볍게 사는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이 멍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기 부정이요,
섬김이요,
사랑의 십자가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가 되사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약한 자의 강함이 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추한 자의 정함이 되사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그 예수님은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만국인의 구주가 되신다.
모든 왕의 왕이 되신다.
또한 심판하실 주님이 되신다.
곧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主)의 주(딤전 6:15)가 되시기 때문에 결국은 공의로운 심판으로 선과 악의 세계를 완전히 구분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광이 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