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가정은 국가와 사회의 기본단위로써 가장 중요한 현장이며, 최고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국가나 사회적인 문제 그리고 청소년 문제 등을 통해서 나타나는 수많은 병리 현상들은 온전한 가정의 부재로
인하여 빚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이나 중요한 가정의 온전함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창3장에서 인간을 넘어뜨린 바로 그
사단에게 속고 있는 남편과 아내들의 불신앙으로부터 싹이 트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 문제를 가져온 어두운 세력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그 흑암의 세력을 완전하게 넘어뜨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현실문제와 가정문제 등 어려움이 반복되는 것은 아직도 뭔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이라 할 수 있는 아내 된 자들이 가정의 대들보인 남편 or 남자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달을 때 가정은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것이고 각자의 온전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남자 or 남편"이라고 번역되는 (이쉬)는 첫 자음 (알렢)이 황소 뿔을 근원으로 갖고 있으며,
중간자음, (요드)는 손을 보고 만들어낸 자음이며, 마지막 자음 (쉰)은 강한 이빨을 상징하는 자음이다.
결국 "남자 or 남편"은 황소 뿔과 이빨을 지니고 있어 힘과 능력이 있는 자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엄청난
힘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정되게 되어 있음을 말한다.
인간을 조정하는 손은 단 두 가지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하나님의 손이 붙잡을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당연히 사단, 마귀의 손에
붙잡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는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지만 마귀의 손에 붙잡힌 자는
힘을 갖고 있으니 안 하는 짓이 없고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불신 남편과 함께 하는 아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흑암 세력을 먼저 결박하는 것이
가정을 살리는 가장 우선 순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창1:27에 "남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이쉬)가 쓰이지 않고 (자칼)이 쓰여지고 있다.
(자칼)은 "남자"뿐 아니라 "수컷"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이며 레위기서 등 많은 부분에서 수컷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명사에는 원래형이 있고 동사로부터 파생된 파생형이 있는데 "남자"라는 명사 (자칼)은
파생형으로써 어원인 동사 (자칼)이 되면 "기억하다"라는 뜻이 된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피조계의 수컷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며 남자 역시 하나님에 위해 기억되어진 자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남편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기억되어질 때 그 남편에 의해 여자는 함께 인정받고 기억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흔히 결혼이라는 의미를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법적 사회적 형식을 갖추어 하나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헬라어가 지니는 결혼의 의미는 보다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법적인 구속력과 사회적인 구속력을 지닌 혼인이라는 형식을 강조 할 때는 (가모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으로써의 결혼한 사실 자체를 강조 할 때는 (휘판드로스)를 사용한다.
(휘판드로스)는 "결혼한"이라는 형용사이며 (휘포) (안드로스)의 합성어이다.
(휘포)는 "아래에 or 무엇인가에 예속된 상태 or 아래에서 무릎꿇는 자세"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안드로스)는 남편이라는 명사 (아네르)의 소유격이다. 결국 "결혼"을 의미하는 (휘판드로스)는 아내 된 자들이 남편 아래 무릎꿇는 자세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 정도가 아니다.
에베소서5:33에는 여자들을 향하여 남편을 경외하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경외라는 단어 (포베오)는 "경외하다 or 두려워하다"라는 뜻이며 이것은 구약 히브리어의 (야레)와 동일어로
보고 있다.
히브리어 (야레)는 "경외하다 or 두려워하다"라는 뜻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워 할 정도로 경외한다고 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남편을 대할 때 하나님을 대하듯이 경외하고 두려워하라는 (야래)와 동일어인 (포베오)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여성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의 중심인 남편이 존경받을 만큼의 믿음과 인격을 갖춘 자이기 때문에 경외하고 복종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만약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백해무익한 남편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는 오직 남편이요 가장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며 아내들은 무릎 끓고 순종하는 자세로 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속죄의 은총이 가슴깊이 젖어드는 자가 분명하다면 억지로가 아닌 성령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남편을 섬기며 가정과 가문을 지켜나갈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능력인 것이며,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능력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가정을 세우는 자가 진정 능력 있는 자인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능력인 것이며,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능력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가정을 세우는 자가 진정 능력 있는 자인 것이다.
그런 아내들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빛은 비춰지고 모든 흑암의 세력들은 물러가게 될 것이며 가정
현장을 지키는 파수꾼들을 통하여 이 땅의 현장은 정복되며 복음의 물결은 강물처럼 온 땅을 적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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