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참된 유일의 목적과 의무와 본분이 무엇인가?
하늘에 일월성신은 빛을 발할 목적으로,
꽃은 열매맺을 목적으로,
시계는 시간을 알려 줄 목적으로,
피아노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목적으로,
실과 나무는 결실하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범죄한 인간들은 배로 하나님을 삼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들이 다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에게 종종 이런·저런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깨우치며,
자는 잠을 깨워 하나님을 쳐다보게 하며,
하나님을 가깝고 영교하게 하며,
영광을 돌리게 한다.
세상에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편안할 때에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극히 적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험과 역경 속에서 시달릴 때 비로소 생명과 건강과 축복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찾게 되며, 경배하게 된다.
성도라 할지라도 편안할 때는 기도의 열과·신앙의 열이 적지만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당하면 주야간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짖게 된다.
교회가 편안할 때는 방종하기 쉽고 잠꼬대 하기 쉽지만, 교회가 핍박받는 때는 교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매어 달리며 능력을 간구하게 된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에서도 보면 주머니에 돈이 있고·먹을 것이 많고·친구가 많고·웃음이 많고·향락의 즐거움이 많을 때는 아버지의 은혜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행자지 한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고, 의복이 남루하고, 친구와 향락의 즐거움이 끊어지고, 배가 고파 죽게 되어지는 때는 아버지의 은혜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고통과 번민과 눈물과 한숨과 고독과 비애 이런 천신만고의 고난을 통한 후에 비로서 아버지 앞에 불효한 죄와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인 줄 알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고난 후에 진실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삶이 안이하면 부주의하게 되어 죄 가운데로 빠지게 되지만, 고난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가치관과 목표를 변경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한다.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 4:l)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면,
성도는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롬 6장에서 성도를 주관하지 못하는 죄의 권세에 대하여 교훈한 적이 있다.
성도는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죄에 대하여 종 노릇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베드로 역시 같은 사상을 가진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승리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는 고난"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6).
보편적으로 인간은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 고난이 닥치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가치관이 변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과 짝하여 죄를 지으며,
육체의 남은 때를 산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밀려 와도 세상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세상적 삶은 이방인의 때에 족한 줄로 알고 죄악된 인간의 뜻 안에서 살기보다는 이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두 종류이다.
사람의 판단에 따라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산다.
세상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사는 성도를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
그러나 그들의 비방이 성도를 낙심시키거나 좌절시키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육체적으로 죽었으나 영으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 있다.
이생에서 세상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죽은 자들이지만 죽기 전에 이미 복음을 믿었다.
그들은 육체로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사람의 표준에 따라 심판을 받고 순교하였지만, 죽은 후에는 오히려 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죄와 고난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도가 신령한 태도를 갖지 못한 채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은 그리스도인을 순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당함을 인하여 비참하게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교회를 결속시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고난"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과,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피차에 책임져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기도와 사랑은 이러한 책임 가운데 하나이다.
성도들은 열심으로 기도하며, 열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또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며,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 서로 봉사해야 한다.
그러한 모든 청지기적 봉사는 결국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
이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동반된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에 성도는,
1) 시련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받는 시련은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2) 시련중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3) 시련 중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도덕이나 윤리적 범죄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하여 고난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받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결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4) 시련 가운데 말씀을 증거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해야 한다.
줄을 타지 않고는 거문고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없고,
포도는 술틀에 넣어서 짜지 않으면 아름다운 감미를 맛볼수 없으며,
금과 은이 귀하나 땅 속에서 파내어 불에 연단하여야 비로소 광채가 나며 가치가 들어난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루는 것은 곧 고역이요, 무거운 짐이 되나 그것 때문에 학생들의 지식이 향상되며, 장래에 성공이 있게 된다.
일한 후에 오는 안식은 더욱 감미가 있으며,
슬픔 후에 오는 기쁨은 참 아름다우며,
굶주린 후에 오는 배부름,
이별 후에 오는 상봉,
고생끝에 오는 영광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성도는 시련을 당하나 후에 영광을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받음이 영광일진대 성도는 선을 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여 축복과 영광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내일의 안락한 꿈을 계획하는 자는 많으나 그날 그날의 괴로움을 참고·견디며·맡은 일에 충실한 자는드물다.
천리 길도 한 발자욱부터 시작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영원한 꿈도 하루 하루 괴로움의 발자취가 없이는 성취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주를 향한 신앙도 여러 가지 시험과 핍박과 고난을 참고 견디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기쁨과 영광으로 풍성히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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