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 요 6:41∼51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4. 20. 17:4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셨다. 그러나 이적을 본 자들은 모두 떠났다.

또한 유대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증거를 거부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반박치 못하고, 인격적인 모독을 가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시골 출신이며, 목수의 아들이며, 학식도 없다고 비방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외적 표준에 의해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개인적 변호를 중지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저항한다. 하나님은 모두를 다 이끌 수 있으나 저항하는 자들은 그대로 두신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끌려온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시다. 이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닌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타락한 피조물로서 죄를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증오하는 부패한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자녀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 교훈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교훈을 듣고, 배운 자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로 온다고 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안에 이미 영생이 주어졌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처럼 예수님을 거부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다. 사람들은 이적을 보면서 놀라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 이적을 일으킨 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눈감아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는 문제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잘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는가?에 대해서는 설교를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부족하였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그런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감당하시고,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있어 누구신가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너무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나는 … 누구 누구이다"라는 구문이 일곱 번 발견되고 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

 3) "나는 양의 문이다"

 4) "나는 선한 목자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나는 포도나무다"
이 같은 예수님의 자기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자신을 말씀하셨다.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요 6:50∼51) 이 땅에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땅위에 사람들이 먹는 떡으로 오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떡이다", "우리의 밥이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왜 예수님께 나아오는가?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우리들의 육신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우리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해소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굶주려 있는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시기도 하셨다. 따라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이 선언의 배경에는 "수많은 군중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셨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온 많은 사람들은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통해 배불리 먹고 난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아 더 이상의 굶주림이 없게 하자는 뜻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피하여 그곳을 떠나셨다. 그러자 다음날 다시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같은 장 26절는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첫 번째 이유는 "배부르기 위하여" 찾는다. 이 말은 그들의 신체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병이 들었다면,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는다. 삶에 문제가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는다. 사업에 실패하였다면, 이 실패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사람마다 다 그 문제를 해결 받았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만약에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어떤 신체적인 문제가 있던지,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다 그 문제의 해결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도 예수님을 만나려 했던 것은, 그들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하여 주님을 찾았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시다. 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단순히 육신적인 양식만을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오는 실수를 범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예수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하시고, 발전시키시고, 부자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우리를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표적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먹이시는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그 자체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무리들의 모습 속에도 있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제이다.

 본문 6장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성의 우물가에 있던 여인의 사건과 대단히 흡사하다.

본문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대한 교훈은 4장에 나오는 "생명의 물"과 병행되어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살아있는 물"(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본문 6장에서 예수님은 "영생의 양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실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사마리아 여인이나 유대 군중들이나 동일한 것을 구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생명의 물"을 예수님께 구하였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마시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이다. 6장에 나타나는 유대 군중들도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구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이는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을 발견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인생의 기초적인 필요한 요소들인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들이 충족된다. 이런 기초적인 필요들은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는 채워주시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들에게 이런 기초적인 필요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누군가가 구하지 않아도 들풀들을 아름다운 꽃으로 입히시며, 산의 새들이 굶주려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키우신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고, 주님께 나아와서 끊임없이 이런 기초적인 필요를 위하여 구하고, 이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위해서 주님과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기초적인 필요들을 채우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런 기초적인 것들을 위하여 살지 않게 하시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본장의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농부들이며,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어부들이다. 그들에게는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힘들게 하루 종일 들에 나가서 일을 하고, 바닷가에 나가 밤새워 고기를 잡았다. 그 고기를 잡아서 볕에 말리고, 그것으로 양식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있어 먹고 마시는 문제는 큰 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일하는 것, 참으로 썩어 없어져 버린 것들을 위하여 인생을 보내지 말고, 썩지도 없어지지도 아니할 것을 위하여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자 유대 군중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런 썩어지지 않을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란 무슨 일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유대 군중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모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모세는 우리 조상들을 광야에서 먹이되,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통해 먹였습니다." 이 말은 만약 당신이 새 모세로서 이 땅에 왔다면, 모세처럼 우리들을 육신적으로 먹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유대 군중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육적인 양식을 구하고, 영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같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어째서 그들은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없었으며,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전환할 수 없었을까요? 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구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말씀이해와 잘못된 역사 이해로부터 온 것이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모세를 보낸 자는 하나님이시며, 광야에서 떡을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표적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그 사실 자체, 보내신 하나님이 바로 표적이라는 것이다. 모세 자신도 만나를 자신이 보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만나는 하나님이 내리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인생의 기적 뒤에 숨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세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역사적 사건 뒤에 숨은 역사의 의미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역사의 뒤에 숨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모세의 만나는 유대인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그 광야에 뿌리셨던 하얀 가루와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 먹을 만큼 내려 주시는 이 만나를 가지고 떡을 해서 먹기도 하고, 각종 음식을 만들어 먹고 생존하였다. 그렇다면 이 만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그것은 말씀이며,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분이시며,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생명의 떡이 된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면, 먼저 우리가 그 말씀을 먹고,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며, 옷이 헤어지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께 오는 사람", "주를 믿는 사람"은 말씀을 우선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생명의 말씀, 이 생명의 떡,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하고 살아야 만이,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의복이 헤어지지도 아니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들이다. 예수님 당시도 떡을 준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까지 따라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제 성도는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적당한 일기와 햇볕을 주셔서 곡식을 익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신령한 양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영접하게 하시고 매일 매일 신령한 말씀으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