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복음가는 '복음송', 또는 '복음성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복음가의 사용 문제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가 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음악적으로 질(質) 낮은 복음가가 상업성을 띠고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신앙 경험을 토대로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하여 복음가를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도 많은 복음가가 만들어지고 또한 폐기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근래에 많은 복음가가 등장하면서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는 근래에 나온 복음가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생각됩니다. 어떤 특정 단체에서 복음가를 만들어 부릅니다. 기존 교회에서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복음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출석한 교회에서 전혀 부르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합니다.
※ 복음가란 무엇인가?
복음가는 두 종류의 의미가 상존해 왔습니다. 이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첫째 의미는 복음가란 교육이나 전도를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가는 분위기 조성이나 감정 유도의 목적, 혹은 오락이나 여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음악이 본래 목적을 이탈하여 자신 감정을 달래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복음가의 이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어떻게 종합하고 정리해야 것인지 커다란 과제입니다. 복음가는 처음에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가는 원래 복음 찬송(Gospel Hymn)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복음찬송의 기원을 1870년대로 잡습니다. 이 때가 바로 부흥사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1837-1899)의 전도 집회가 불길처럼 타오를 때입니다. 무디의 전도 집회 때 청중들을 사로잡는 아이라 데이비드 생키(Ira D. Sankey : 1840∼1908)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전도 집회 때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생키의 노래는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전점 그 인기가 높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고 이런 호응을 바탕으로 많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생키가 부르는 전도용 복음 찬송 중에 "어려운 일 당할 때",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십자가 군병 되어서", "주 날개 밑 내가 편히 거하네" 등이었습니다. 이런 전도용 복음 찬송이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복음가(Gospe song)가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191장 342장 349장 391장 397장 412장 478장 535장).
처음에 이 같은 복음가는 긍정적으로 환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면인 많은 부작용과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김의작, 교회 음악론 87쪽).
① 이 복음가는 예배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부패케 한다.
② 복음가의 선율을 교회의 예배에 등장시키는 것을 찬성할 수 없다.
③ 이 복음가는 찬송이 아니다.
④ 이 복음가는 문학적인 것이 못되고 화성도 유치하다.
⑤ 천박한 것이다.
⑥ 복음가는 장중함과 위엄을 가진 예배 시에 부르는 찬양의 노래가 아니다. 등등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 찬송(Gospel Hymn)이 아니라 복음가(Gospe song)일 뿐입니다. 그리고 복음가가 처음 시작할 때는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흥미와 감정 유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되어 버렸습니다.
※ 복음가의 출처
복음가를 세계적인 부흥사인 무디를 따라 다니며 회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1870년대의 생키의 노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때부터 복음가가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불려 지는 복음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의 메시지를 정리하여 압축해서 교육하고 그들에게 결신과 결단을 호소하는 노래였습니다. 이런 의미의 복음가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시간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가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필요가 없다면 이 복음가는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즉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이 같은 복음가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찾아낸 성경적 근거로서 신명기 말씀에서 찾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19).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신 31:22).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게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신 31:30).
이상과 같은 말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말씀한 "이 노래를 써서" 부르게 한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하고 경고하는데 사용된 노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복음가의 시초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음악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허락한 음악과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그 것은 큰 실수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허락한 노래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는 차원이었습니다. 이런 특별 계시를 오늘날 우리들이 만들어 부르는 노래인 복음가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는 것은 언어 도단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복음가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복음가에 대한 근거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다음과 같은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의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진노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즉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은 죄인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돌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찬송도 영광도 돌릴 수 없습니다.
요 5:44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① 기도를 통해서 영광을 돌립니다. 이 기도는 말(언어)를 통해서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다.
② 행동을 통해서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성경에 보면 경외의 자세와 태도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최대의 존경과 경외의 자세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③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립니다. 이 음악은 단순히 소리뿐만 아니라 그 소리에 멜로디를 가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음악은 가사뿐만 아니라 멜로디가 장중하고 장엄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찬양의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수단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① 글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이것을 문서 선교라고 합니다.
② 영상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예배 때 영상을 통해서 설교하는 것을 영상 예배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영상으로 예배 드리는 개념"은 없습니다. 단지 설교가 영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의 복음선포는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③ 소리를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청중들의 듣는 귀를 통해 마음에 호소합니다.
④ 소리에다 곡을 붙여 음악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복음 선포 형식이 음악입니다. 이같은 방법이 오늘날 말하는 "복음가"의 형태입니다.
복음가의 근거는 소리와 곡인 음악을 통해서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을 결단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음악을 통해서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이런 의미의 복음가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특징이 있습니다.
※ 복음가의 특징
복음가의 출발 자체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섭리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부터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가가 복음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그릇 역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됩니다. 질그릇에 꿀을 담으면 꿀단지가 됩니다. 그러나 그 단지에 오물을 담으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오물 단지일 뿐입니다.
복음을 담은 음악은 복음 때문에 그 음악은 값이 나가는 음악이 됩니다. 또한 가치 있고 거룩한 음악으로 손질하고 다듬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가 역시 세상 음악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사는 물론이거니와 곡 역시 세상의 그것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것을 구별이라고 합니다.
같은 "음악"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음악이라는 단어가 세상 음악이나 교회 음악이냐에 따라 그 단어는 같은 음악이지만 그 내용과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단어의 객체로 놓고 보았을 때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 단어가 문장 속에 들어갈 때는 그 단어의 의미를 그 문장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언어학에서 말하는 의미의 단일성입니다. 음악이라는 단어의 객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악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사용될 때는 그 교회와 결부된 의미가 진짜 의미입니다. 세상적인 의미가 개입되면 안 됩니다.
복음가의 특징은 신앙적인 체험을 노래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감동을 줍니다. 또한 구원을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쉽게 감격하게 합니다. 가사는 주관적인 것으로 듣는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런 주관적인 내용은 자신을 찬양하면 안되고 간증 형식으로 전도의 수단입니다. 천국에 관한 확신과 행복을 열망하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리스도의 증거와 경고로 경각심을 일으킵니다. 이방신이나 이단에 대항하는 노래로 군가의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예, 찬송가 388장).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위한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복음가의 특징 때문에 하나님께 드림인 예배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가는 예배 음악이 아니라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용 전도용의 노래로서 전도 집회나 부흥회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김의작 박사는 이 복음가의 특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① 리듬이 자극적이다. ② 멜로디는 부르기 쉽다. ③ 가사는 기억하기 쉽다. ④ 화성은 감상적이다.
다음은 강신의 목사가 말한 7가지 복음가의 특징입니다.
① 대중적인 선율로 쉽게 익힐 수 있다. 민요 선율들이 많다. ② 누구나 노래할 수 있게 음력이 좁고 단순하다. ③ 흥미를 끌 수 있는 리듬을 많이 사용한다. ④ 같은 선율의 반복이나 후렴이 많다. ⑤ 화성은 주요 삼화음을 사용한 단순한 화성이다. 주요 삼화음이란 1도 화성, 4도 화성, 5도 화성이다. 도미솔, 파라도, 솔시레를 주로 많이 사용한다.⑥ 사람의 감정을 유발시킬 수 분위기의 음악이다. ⑦ 인간을 위한 노래이므로 아멘이 없다.
이상과 같이 복음가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복음성가나 복음 찬송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냥 복음가 일 뿐입니다.
※ 복음가의 사용과 변질
복음가는 전도나 교육용으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흥미나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인위적인 감정 유입용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음악을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찬양으로는 부적절합니다.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도 경배와 찬양 부분이 아닌 설교 시간에 청중들로 하여금 결단하게 할 때 복음가의 취지를 살려 복음가를 부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란 시작부터 축도로 마칠 때까지를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예배 시간 앞부분에 경배와 찬양만이 진정한 예배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배의 앞부분에서 행한 경배와 찬양이 끝난 다음에 설교 이후 시간에 복음가를 부를 수 있다고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축도까지 그 모든 순서는 결국 예배의 다양한 형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헌금 순서도 하나님께 예배의 한 형태입니다. 새 신자를 소개하는 그 순간도 그것은 예배의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었던 영혼을 예수 믿게 해서 교회에 나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시간이 바로 새 신자를 소개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새 신자를 소개하면서 그를 환영하기 위해 박수를 친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박수와 영광을 받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입니다.
오늘날 복음가를 어떻게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습니까? 분위기 조성이나 회중들을 흥분시켜서 무아지경에 빠지도록 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복음가를 통해서 오락이나 여흥의 도구가 되어서 인간을 즐겁게 하는 놀이 문화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를 드릴 때 복음가를 사용하여 인간을 찬양하거나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여 회개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이런 복음가를 부르다가 사회자가 목사님, 하면서 "목사님 찬양, 목사님 찬양"하는 형식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골 3:16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습니다.
복음가를 노래하는 것은 많은 기쁨을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말한 신령한 기쁨이라는 것은 이런 인위적인 방법이나 수단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구원의 감격과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돌봐주신 그 극진하신 사랑에 대한 감격에서 오는 기쁨으로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 복음가의 회복
복음가의 회복은 결국 그 복음가를 만드는 사람이나 그 복음가를 부르는 우리들이 변화되지 않고 회복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가에 대한 바른 의미를 깨닫고 날마다 "나는 실수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자기 반성과 자기 반성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옳은 방법인 줄 알고 그대로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방 종교에서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어제까지 섬겼던 우상, 좋아하던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신을 찬양할 때 초인간적이며 신비의 황홀 체험에서 벗어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룩하게 찬양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마치 세상의 가수들이 공연할 때 좋아하는 그 청중들처럼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기독교 이방 신을 섬기는 방법을 모방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방 신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우리들의 모든 문화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가의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사용은 교회 음악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올 때 가능한 일입니다. 부정적인 면을 잘 관찰하여 잘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가는 리듬이 대중적이어서 쉽게 흥분되고 쉽게 식습니다. 그런 곡들을 가려서 너무 지나치다 싶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목회자는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 무관심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면 방치할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전문인을 양성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음악 목사는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복음가의 약점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멜로디는 감정적이어서 쉽게 익힐 수는 있으나 천하게 느껴집니다. 화성은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동화되기는 하지만 쉽게 지루해 합니다. 가사는 신비적인 은혜를 강조하므로 신학적이나 성경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가는 신앙 간증의 한 형태의 노래로서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되기 쉽습니다. 서정적이고 감상적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와 맞지 아니할 때가 있습니다. 내세적이어서 현실을 쉽게 포기하거나 도피하게 합니다.
이런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가를 잘 사용하면 교회에 큰 유익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복음가는 음악적인 훈련과 신학적인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많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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