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더 이상 고난받을 필요가 없다
"앉으셨느니라"의 표현은 신약에만 20번 정도가 나온다. 히브리 8:1이 좋은 예이다.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이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그가 왜 앉으셨는가? 하는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그리고 십자가에 그는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19:30). 무슨 뜻인가? 그가 지극히 높은 위엄의 오른편에 앉기까지 그의 구원은 마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성자로서 할 일을 마친 것이다.
하나님께 두 번이나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너는 나의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눅 9:35, 마 3:17). 세상에 사랑으로 그의 뜻을 행하고 그 자신이 축복 그 자체로서 성부를 만족시킴으로 그를 완전히 기쁘게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요 6:38)
십자가에서 그가 하신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다. 아브라함 계약의 한 지체로 오셨다. 그래서 할례를 받았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히브리인으로의 할 일을 마쳤다. 그는 계약을 완성했다. 율법과 계약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시켰다.
그것들이 다 충족되었기에 옛계약은 옛법과 함께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제 새계약이 새법과 새피조물의 사람들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눅 22:20, 고전 11:24). 죽음에서 일어났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를 하늘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셨다. 그는 우주대법정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켰다. 그리고 구원의 문서에 붉은 도장을 찍으셨다. 히브리 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그의 피 안에서 모든 것이 새계약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예수께서 세상에 가지고 오사 새피조물의 사람들에게 주신 새로운 종류의 사랑에 근거한 새법이다. 이 새로운 종류의 사랑은 아버지의 성품이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일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 성품을 합법적으로 주실 수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대로 새피조물은 새성품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제 새피조물을 위한 새계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새피조물을 위한 새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새피조물로서 새계약을 지키며 새법 안에서 행한다. 이제 자신의 일을 마치신 후에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의 안식에 들어가셨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히브리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는 자신의 안식에 들어가셨다. 하나님도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안식하셨다. 예수는 새피조물을 위해 오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사탄을 정복하셨다. 자신의 희생으로 죄를 없앴다. 아담 안에서 사탄과 연합했기에 인류가 당해야할 모든 의의 요구를 다 짊어지고 고통하셨다. 이제 그는 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이 일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히브리 1:3을 다시 보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일로부터 쉬신다. 하던 모든 일과 몸부림을 쉬고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나는 그의 완성된 일 안에서 안식한다. 그 안에 정착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신자도 자신의 죄의 성품과 싸우지 않는가?" 새피조물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어둠의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진 존재임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반 정도 살아있고 반 정도 재창조되었으며 아직도 자신의 옛 성품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들은 어린이의 삶으로부터 절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3:1∼3은 그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희를 영적인 존재로 대하지 못하고 단지 감각적으로 지배받는 신자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 사람들은 자연인처럼 행동하였다. 이 패배한 사탄에게 지배 당하는 감각적으로 지배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몸을 병으로 채운다. 돈 문제를 이상하게 꼬이게 한다. 주 안에 있는 조용한 신앙과 확신을 빼앗아간다. 그래서 그의 안식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아마도 마귀에게 지배받던 옛습관을 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패배당한 그에게 지배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나는 신앙이 없는데."
고린도전서 3:21은 이것을 설명해준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우리는 부자이다. 하늘의 부가 우리에게 속했다. 하지만 그것을 써먹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엄청난 부를 하늘 대법정이 주지 않은 것처럼 산다(엡 1:3).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3:8에 말씀하신 측량할 수 없는 부를 모른다. 우리 내면의 사람 안에 주어진 그의 영의 권능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 속에 계심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뿌리가 박혀서 성도에게 주어진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와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넘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내 병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사야 53:3∼4을 읽어보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병)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바는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를 질고(병)을 지고 우리의 슬픔(고통)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스도는 우리 위해 또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하신 일은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새피조물이라면 사탄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요한일서 4:8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사랑 성품이 우리 성품이 되었다. 그는 신앙의 하나님이며 우리는 신앙의 자녀요 사랑의 자녀이다. 그는 의로우시다. 우리도 의로운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치유되어 건강한 자녀들이다(엡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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