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과 증거
선전하는것과 증거는 다른것입니다.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온 그 놀라운 사실을 14년만에 증거하면서도, 입만 벙긋하고 바로 닫아 버린것을 우리는 읽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선전)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더 나아가 우리 주님의 모습은 더 엄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리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못하리라."
증거와 증언은 생명을 걸고 해야 할 일입니다.
증인이란 말 자체가 "순교자"란 뜻이 있는것도 이 때문입니다. 증거는 복음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선전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드러내는 일체의 행위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드러내면서 겸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행위에서도 자기를 나타내는것입니다. 축복받은 사역을 드러내는것 속에 자기를 나타내는것은 선전입니다. 이러한 깊은 내면의 움직임은 성령님만이 꿰뚫어 보시는것입니다.
"나를 나타내고 싶어하는" 심성은 참으로 끊기 어려운 육신입니다.
특별히 조심할일은 하나님의 긍휼하심를 입었을 때입니다. 전적으로 긍휼하심으로 되어진 일들(사역)을 내세워서 자기를 은근히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것은 참으로 두려워할 일입니다. 왜냐면 주님은 그 동기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은 결코 이런 성향을 지나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징계하시고 징계하여도 계속 그렇게 나가면. 긍휼하심을 거두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제 막 시작한 초입에서. 앞으로 먼길을 가야할 사람이 벌써부터 이렇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요즈음은 편리한 인터넷이란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것을 보면 더 안타까운 것입니다.
지금 서울 어느 모 이름있는 교회에서 새로 미국에서 부임한 담임목회자의 사역이 아주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현상을 봅니다. "부흥의 주체"가 되버린 것처럼 . 그 교회. 그 사역자를 이미 한국교회의 부흥의 중심 도구로 쓰시고 계시는것 처럼 "선전"되고 있음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 모든 교회의 부흥을 기도하고, 어느 교회에 이런 영적 뜨거움이 일어남에 대해서 반가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본의아니게 . 변질이 된다면 하나님앞에서 참으로 송구스런 일입니다. 또 이런 현상에 덩 달아서 이런 "선전"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할 일인것입니다.
또 하나 선전을 조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내게 베플어 주신 그 어떤 것이라도 드러내면 . 그렇지 못한 형제들. 동역자들. 형제 교회가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도전"이 된다고 하겠지만. 상처가 더 큰것입니다. "그것은 시기요 질투"고 하겠지만. 그렇게 형제로 하여금 시기하고 질투를 느끼게 한것이 상처인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디로 보나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랑스런 영광의 본체이시면서도 낮고 천한 육신을 입으시되. 나사렛 목수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선전"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