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과 조연, 주류와 비주류
장미는 너무 화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뛰어납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저희 집 앞 장미공원에서 산책을 하다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미꽃은 꽃집에서도 항상 꽃바구니의 중심에 자리를 잡습니다.
다른 꽃들은 이 장미의 탁월함을 더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미꽃을 보면서 저의 인생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아무래도 뛰어나고 특출난 주연급이 아니고 그저 그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조연급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한때는 이러한 나자신의 모습에 대해 굉장히 자격지심을 가졌고 부담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학업을 하는 기간에 더 이러한 상처를 받으면서
아니꼬운 꼴들을 수없이 보면서 이를 악물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 가면서 오히려 이제는 이런 나의 모습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런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인해서 가장 상처를 깊이 받은 분이 사도 바울로 보입니다. 알다 싶이 바울은 교회의 대적자였고 박해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사도의 반열에 서 있다는 그 자체가 넌센스이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질책과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 시기와 소외...등등
아무리 원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도 상처입기 쉬운 위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도 바울이 사도됨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만은 절대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자기가 사도됨을 누누히 어찌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변호를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것이 너희라"(고전9:2)
이토록 억지 비슷한 고집스럽게 사도됨을 주장하며 사도의 반열에 설려고 함이 무슨 까닭일까요. 바울 자신도 자기는 비주류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되는 것만도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도에서 뛰어나 자기가 사도라 함은 하나님께서 바울자신에게 주신 은혜때문이었습니다. 사도됨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자기는 분명히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모순된 심리가 있었고. 상처투성이된 심성을 안고 사역했던 것입니다. 밀어내는 주류에 맞서서 그들 주류보다 더 당당한 모습으로 살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내적 싸움을 했겠나 짐작이 됩니다.
저는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이 비주류로서 소외된 영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그 분 내면에는 깊은 상처와 분노. 그러면서 도전하는 강한 의지력등, 뒤범벅된 복잡한 내면이 오늘 그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감사한것은 하나님은 이런 소외된 계층을 더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강한자 보다 약한자의. 있는자보다 없는자의. 지혜있는자보다 미련한자의. 존귀한자보다 비천한자의 하나님이심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의인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죄인의 하나님이심이 복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점점 주류의 편에 속해져 가는 현상이 심각한 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단적으로 한가지 예를 든다면, 설교하는 목사들이 입는 목사가운의 문양을 보면 양쪽 어깨부분 팔걸이에 세줄의 장식이 있음을 봅니다.
이 문양은 박사학위가 있다는 표식입니다.
TV에 방영되는 설교영상을 보면 거의 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보시면 웃을 일입니다. 도대체 세상적인 인정을 그리도 나타내려 하는 어리석은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비웃을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이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얼마나 우리 목회자들이 알게. 모르게 주류의식에 젖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 봅니다.
이런 장식을 보는 평신도의 눈에는 허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게도 주류가 되고싶은 욕망이 언제나 솟아남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것이 거짓일테니까요....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강한 정제감이야 말로 이런 허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봅니다.
저는 화려한 장미꽃이 아니점에 감사를 드립니다. 들에 핀 별볼일 없는 아무데나 피어서 그저 향기를 낼 수만 있으면 하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에 속함을 감사드립니다.
왜냐면 이 땅위에는 주류보다 비주류에 속한 자들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