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의 혼동 - 마 16:21∼24
아무리 힘이 쎈 사람도 물에 빠지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해낼 수 없다.
힘이 쎈 사람을 구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
우선 붙잡고 보자는 마음으로 구하러 들어간 사람까지 꽉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둘 다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기다릴 수 없을 경우에는 몽둥이 찜질을 가해서라도 힘을 뺀 후에 붙잡고 나와야 나도 살고 그를 살릴 수 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된다.
자기 감정이나 자기 판단을 따라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매사를 자기 경험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기분이 나쁠 때는 교회도 가질 않는다.
그런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 죽어야지 기분이 나쁠 때 죽었다가는 천국에 가는 것도 힘들지 모른다.
신앙생활은 자기의 성질과 고집을 버릴 때 성립된다.
자신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게 할 때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에 그런 원리가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이제 곧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자기 노선을 분명하게 밝히고 나온 대목이다.
이 때 베드로가 자기 노선을 드러냈다.
스승인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면서 죽어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럴 수 없다고 자기 주장을 폈다.
베드로는 예수야 말로 세상을 이길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예수가 패자가 된다는 이해될 수 없는 말이었다. 여기서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승리에 대한 노선 차이가 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노선은 어떤가?
이 세상에서의 승리,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지는 승리자가 되게 해달라고 예수께 간구하는 우리는 아닌가? 내세야 있건 말건 지금 여기가 좋다는 승리의 노선을 걷는 것은 아닌가?
예수의 노선은 달랐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승리야 말로 사단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영원한 승리노선을 예수는 걷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본문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첫 번째 많은 고난을 받겠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세 번째는 제 삼일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라는 이 세 가지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고난을 받는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라고 말씀하셨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산헤드린공회원을 가리킨다.
이 산헤드린공회원들은 국회의원와 같아서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을 관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71명으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절대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 사도도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산헤드린공회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의기양양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이제 내가 얼마 후면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래서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히고 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라고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를 못했다.
적어도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귀절을 읽게 되면 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말씀이구나, 이제 부활한다는 얘기로구나 하고 금방 알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알아 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간청을 한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
세상에 참 딱해도 너무너무 딱하다. 어떻게 이렇게 못알아 들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제자들 속에도 영적인 무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사야서 53장에 기록되어진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것이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야 왕국을 이룩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주님이 가르치시지 아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편견이 있다. 각자의 안경이 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똑같은 설교를 듣고 있지만 안경을 쓴대로 듣는다.
즉 자기의 편견대로,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설교를 듣는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전이해(Free Understanding)라고 하는데 이 전이해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삼년 동안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치셨는데도 베드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고 예수님, 그렇게 하지 마세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예수님을 말렸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실제로 주님을 위해서 제일 먼저 죽을 사람이라는 프라이드가 아주 강했다.
그러나 도망갈 때 누가 제일 먼저 도망갔는가? 시몬 베드로이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무슨 말인가? 그는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도록 결코 방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누가 감히 우리 예수님에게 손을 대겠습니까?'하는 말이다.
실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자른 사람이 바로 시몬 베드로였다. 의리의 사나이였다.
자기의 선생님이, 그것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잡혀서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시몬 베드로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였다. 인간적인 생각이였다.
가장 의리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
이것을 위해서 삼년 동안 가르치시고 생애를 바치셨는데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참 신앙은 깨달음을 통해서 발전된다. 이 발전은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시인하고 가슴으로 믿어질 때 생긴다. 이렇게 간단한 신앙 성장의 지름길을 놔두고 제자들은 자기 경험과 지기 주장의 노선을 따랐기 때문에 참 신앙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