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자가 있고, 믿음이 약한 자가 있게 마련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만 모인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강한 자의 윤리가 있다. 강해야 약한 자를 사랑할 수 있다.
강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보자.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평안하니까 남을 평안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누구를 사랑하겠나? 내가 기쁨으로 충만할 때에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사랑 받지 못한 탓이요, 내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이요,
내가 희생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요, 내가 인내할 수 없는 것은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그 신앙이 확실하다면 그까짓 원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먼저 은혜에 강하고, 사랑에 강하고, 은혜에 충만할 때만이 비로소 약한 자를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다.
내 평화가 충만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어느 때이고 보면, 언제든지 콤플렉스(complex)가 있는 사람이 문제다.
벌떡벌떡 화를 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기적인 사람, 유치한 사람이다. 아직도 어린아이라서 저만 위해달라고 떠드는 것이다.
언제 자랄 것인가? 몸집이 크다고 어른이던가?
정신적으로 네 살도 못된 어린아이니까 그 모양인 것이다.
저만 위해 달라고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내가 강하고, 내가 성숙하고야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이것이 성숙한 사람이다.
자기 기쁨에 살지 않고 남을 기쁘게 하는, 그 기쁨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언제나 저 사람을 기쁘게 할까,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give and take'이다.
남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쁠 수 있다.
남의 기분을 뒤틀리게 하고 자기가 기쁠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라.
부부간에도 그렇다.
미우나 고우나 저 사람이 기뻐야 내가 기쁜 것이다.
저 사람이 틀리면 만사가 다 틀린 것이다.
그런고로 '먼저 내 기쁨이 충만하고야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먼저 내 행복이 충만하고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고로 또한 남을 이해하게 된다.
저는 '이해'라고 말하면 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자주 생각하게 된다.
고양이와 개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운다.
어느 인류학자가 '그것은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한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간다.
반면에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전혀 다른 문화권이요, 다른 신호를 가졌다.
그러니 개가 고양이한테 "I love you"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꼬리가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면 고양이는 '너는 왜 나만 보면 싸우자고 하느냐'라며 개한테 '앙'하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허구 헌 날 싸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