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한 성도들의 삶 - 골 1:24∼29
말씀으로의 접근
혹시 삶이 엉망이 되어 본 경험이 있는가?
왜 이렇게 삶이 얼키고 설키어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는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혹시 이러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마음이 어떠했던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한 기억이 있는가?
여러분의 가슴에 삶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불씨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아니면 나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면서 방황하고 좌절하는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국가적으로 어려운 때를 살고 있으므로 내가 아니면 가족 또는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는 비결을 전해 준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위한 믿음이 변치 않는 비밀을 전해준다.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자세와 승리 할 수 있는 천국 비밀을 들려 준다.
골로새서의 저자인 바울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감옥이라는 곳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세상의 막다른 곳이다.
인간의 자유가 억압된 곳이다.
삶이 정지된 곳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불확실하고 불안한 곳이 감옥생활이다.
당연히 내일에 대한 비전이 있을 수가 없고 오늘 하루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영과 육이 만신창이가 되는 곳이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평소에 그렇게 당당하게 큰소리 치는 사람도 자기 처지만 생각하기 급급해지고 부모나 주위환경을 탓한다.
믿는 신자들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차 신앙이나 사명을 버리고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절박한 환경 속에 처해 있던 바울을 주목해 보자.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밀접하게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이 만세 전부터 감취어진 우주적 신비요 비밀임을 깨달을 만큼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더 깊어져 있다(1:26).
또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고난을 해석할 만큼 그의 믿음은 더 뜨거워져 있고 만물이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고백할 만큼 그의 믿음은 더 풍성해져 있다(1:24).
그리고 신음하는 이 우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해서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비전과 감격으로 가슴 벅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20,23).
복음의 소명과 삶의 재발견
내가 교회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25).
우리가 이처럼 바울과 같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이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사명을 재발견해야 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현재 자신이 무엇을 하다 여기에 서있는 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위한 삶, 자기 가족만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으로 불리움을 받은 소명을 발견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일개 범부로 늙어가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의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
모세도 양치기로 그 죽음만을 기다리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비로소 자기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여성이지만 드보라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민족을 구하는 사사로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
신약의 어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서 모두 그 삶이 가치있게 살았다.
성경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신분과 처지가 아무리 미미하고 약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그 인생이 가치있는 놀라운 삶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예수그리스도로의 은혜로 다메섹에서의 중생을 기억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다메섹에서 자기를 만나준 주님과 같이 부활하여 천국으로 가는 것이 최종 삶의 목적지이며 자신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복음의 사도임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있었다.
여러분은 어떤가?
지금 당장 잘 나가는 자리에 있든지 고난 중에 있든지 사도바울처럼
"나는 예수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는가?
천국 소망에 대한 분명한 확신도 있는가?
아니면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의심으로 흔들리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주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하는 일과 주의 복음 전파와 어떠한 가치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가?
교회에서 봉사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삶을 살아갈 것을 고백함으로서 우리를 통하여 복음 전파와 연결된 삶을 살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롬 14:8).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교리적 복음전파 못지 않게 복음적 삶이 따르는 복음 전파가 요구되고 있다.
초대교회를 돌이켜 보면 로마의 혼탁한 사회를 기독교인들의 복음적 삶으로서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교회의 목회적 업무나 세계 선교만이 복음전파이고 평신도의 일상생활은 교회일과 분리되게 생각한 나머지 우리의 삶은 세상적인 요령과 처세로 일단 성공이 최선인 것처럼 얼룩져서 사회에 지지를 받지 못하고 우리의 삶은 무력해져 있다.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불신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지하게 되고 나아가 믿게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행동과 말이 신뢰가 있어야 여러분이 전파하는 복음을 믿게 된다.
여러분의 행동이 신앙과 삶이 반대되는 삶을 살면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까지도 설사 불치병을 낫게 한다고 할지라도 병을 낫게 하는 도구로는 여길지언정 믿지는 않게 된다.
여러분의 하시는 사업도 믿음을 갖고 운영해야 한다.
사업을 통해서 과연 기독교인들이 만드는 제품은 역시 다르구나!
기독교인들이 모인 사업체의 분위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비신자들이 고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이 먹는 식품조차도 불량원료를 사용하여 제조하는 보도를 자주 본다. 안타까운 일이다.
기독교인만큼은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IMF이후 기업의 투명성이 요구되고 있다.
과거에는 장부를 속이는 일이 기업의 능숙한 수단인 것처럼 여겨 왔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관행을 쫓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시장이 지지해주지 않는다.
또한 노조와의 관계에서 항상 불신이 개선되지 않아 기업이 어려움을 당했다.
빨리 정직한 기업으로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
사업을 운영하다 닥친 어려움이 의롭게 하려다 사회의 잘못된 구조로 말미암아 닥친 어려움이라면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반드시 여러분을 재기하여 승리할 수 있다. 반드시 축복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의롭게 행하다 어려움에 닥친 성도들에게는 몇 가지 영적인 축복이 있다.
첫째, 자녀들이 부모의 본을 받아 의롭게 살게 된다.
자녀의 삶이 불법을 행하며 산다는 것 같이 부모에게 형벌은 없다.
바꿔 말하면 자녀가 의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중의 하나이다.
여러분의 후손들로 말이맘아 국가와 민족이 구원되고 지역사회가 구원되고 사람들의 행복해지는 축복이 있다.
둘째, 이 사회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게 된다.
모두가 잘못된 길을 향해 돌진할 때 의로운 행동은 이러한 사회에 제동을 걸고 이 사회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향해 한쪽으로 기울 때 의로운 행동은 저울추 역할을 하여 반대편에서 사회가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불법은 성공을 해도 역사를 후퇴시키며 혼란을 가져와 어두움을 가져오는 반면 의로움은 실패를 해도 역사를 전진시키며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빛이 된다.
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있다.
셋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종교적인 열심, 신학적인 풍부한 지식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는 말씀대로 행하는데 있다.
예수님께서도 성경말씀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시지 말자. 때가 이르면 열매를 거둔다.
오늘날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들 가정의 행복한 모습을 통해서 비신자 이웃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고민은 믿는 가정들 안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심지어 깨어지기까지 한다.
여러분 가정은 어떤가?
부부간에 서로 신뢰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답답한 가슴으로 살아가는가?
주고 받는 상처의 고통 중에 있는가?
자녀들은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고 있는가? 성적을 기준하여 자녀를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더 귀중한 영적인 자원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가?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는가?
성실하고 정직한가?
가족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님의 은혜 안에 단 한사람만 있어도 그 생명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점차 회복되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이 어린아이라도 그 안에 있는 예수 생명의 역사로 반드시 가정이 회복된다.
현재 부부 중 한사람만 믿고 한 사람은 타락된 삶을 산다고 해도 반드시 구원되고 회복된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어야 한다.
일본의 야쿠자들, 오야붕들이 한국여성들의 믿음으로 회개하고 구원받아 간증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 쉽지는 않다.
때로는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아 외로울 때도 있다.
전진할 때보다는 오히려 주저앉고 후퇴할 때가 더 많다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사도는 기도를 통해서 사방이 막힌 그 곳이지만 하늘문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이 승리의 삶이 가능하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힘만이 하나님처럼 살게 할 수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셔야 한다.
의로움에 대하여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우리 역량보다 큰 일이 놓여 있어도 결단하게 하시고 많은 세력 가운데서도 당당히 나가도록 용기를 주시고 오해하고 방해가 있을 때는 지혜롭게 하시고 잘 될 때는 겸손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힘을 받으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사시면서 구속의 과업을 완성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큰 역량이 단번에 주워진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작은 십자가를 지는 연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되어야 비로소 큰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까지 성령충만을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을 보시고 덤으로 차고 넘치게 된다.
이 선물을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된 것을 믿고 신바람나는 삶을 살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