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지금 아빠랑' 姓 다르다고 놀려요"
눈총-편견에 시달리는 이혼자녀 年10만…보육원 맡기기도
일요일인 지난달 4일 오전 고양 일산구 한 아파트. 이모(40·회사원)씨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휴대전화를 걸었다.
"준비됐어?" 아파트 안에서 전처 김모(40·학원 강사)씨가 대답했다.
"지금 내려보낼게. 참, 오늘은 지난 번처럼 비싼 옷 사주면 안돼요."
잠시 후 딸 민지(가명·13)가 쪼르르 내려왔다.
이씨는 민지와 동대문 의류상가에 가서 쇼핑을 하고 함께 저녁을 먹은 뒤, 김씨 집에 데려다 줬다. 지난 95년 이씨 부부가 갈라선 뒤 매달 첫째 일요일마다 반복되는 장면이다. 김씨는 민지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오면서 이씨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딸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민지는 매년 1월 1일은 할아버지 집에서, 설날은 외갓집에서 보낸다. 생일상은 함께 사는 엄마가 차려주고 따로 사는 아빠는 선물을 택배로 보낸다. 민지는 "친구들에겐 '아빠가 유학 가셨다'고 거짓말 하지만, 부모가 함께 살며 싸울 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민지가 양가를 오가면서 이혼 후 서먹했던 이씨 부부는 차차 전화로 직장 얘기, 전세금 고민, 민지 성적 등을 흉허물없이 털어놓는 '친구'가 됐다.
한해 이혼하는 부부는 12만쌍, 그래서 부부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 '이혼 자녀'가 10만여명이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부모 중 어느 한쪽과 헤어지는 심리적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는 자녀도 있고, 양쪽 모두에게서 버림받는 경우도 많다. 이명숙 변호사는 "법정에선 부부가 아이를 공처럼 서로에게 밀치고, 판사 면담을 위해 불려온 유치원생이 부모를 보고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광경이 매일같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 때문에 법정 싸움까지 벌이며 양육권을 확보한 뒤, 상대방이 자녀를 볼 수 없게 방해하거나 자녀를 시설에 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작년 서울시내 보육원에 새로 들어온 18세 미만 청소년 538명 중 70% 이상이 부모의 이혼이나 이혼이나 별거, 가출로 인한 '이혼 고아'였다.(서울시립아동상담소 이정희·소장) 작년 초 결혼 12년 만에 남편과 갈라선 최모(40·공인중개사)씨는 지난 3월 이혼남 박모(40·직장인)씨와 재혼했다. 박씨 딸(10)을 볼 때마다 "잘 키워야 한다"고 이를 악물면서도, 전 시어머니가 키우는 친아들(8)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돈다고 했다. "이혼 당시 전 시어머니가 '아이 곁에 얼씬도 하지말라'고 호통을 쳤죠. 자살하기 위해 경남 진해 바닷가에 내려간 적도 있어요."
박모(여·40·회사원)씨는 올 초 딸(11)을 데리고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딸이 학교에서 남자교사 수업시간에 큰 소리로 떠들고, 교사의 몸을 더듬으며 "안아달라"고 조르는 등 '이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버지가 이혼 후 한번도 딸을 만나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과잉행동 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현수씨는 "재혼 부부의 자녀들은 맨먼저 '옛날 아빠'와 '지금 아빠' 호칭 때문에 큰 혼란을 겪는다"고 전했다. 이혼 부모에게 아이 기르기는 보통사람들의 두 배가 넘는 짐이다. 혼자서 생계와 육아, 가정교육을 책임지면서 동시에 자신의 자녀를 '예비 탈선 인구'로 보는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한다.
이혼남인 40대의 군부대 헬기 조종사 곽모씨의 별명은 '면담 1순위'. 인사철마다 새로 부임하는 지휘관이 "가정이 불안한 사람은 탈영 등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다"며 곽씨를 사무실로 부르기 때문이다. 곽씨는 최근 이혼자 동호회 정기모임에서 "작전 나갈 때마다 초등학생 아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고 털어놓다 끝내 눈물을 보였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성 회원 10여명이 "우리가 돌아가며 맡아주겠다"고 나섰다. "당장은 후련했지만, 곧 좌절감이 밀려들었어요.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없어져야 이혼 가정 아이들이 바르게 자랍니다." 이혼 남녀가 각자 자식을 데려와 재혼한 '삼성 가족' 자녀들은 평생 '성 다른 자식'이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는 윤모(여·34·학원강사)씨는 "아이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기가 겁난다"고 했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두 번째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의료보험증을 내밀 때마다 간호사들이 윤씨 얼굴을 힐끗거리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결혼에 실패했을 뿐, 인생에 실패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몇 번이나 이를 악물었지만, "장차 아이들이 부딪힐 편견을 생각하면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고 했다. 99년 남편과 사별한 뒤 작년 말 이혼남 오모(29)씨와 약혼한 석모(30)씨는 올 초 큰아들 심영준(가명·7)군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말 못할 속앓이를 했다. 영준이가 학교에서 나눠준 가정환경 조사서에 자기 이름을 '심영준'이라고 적었다가, 다시 '오영준'이라고 바꿔 적었다. 같은 반 친구가 "아빠랑 성이 다른 사람이 어디 있냐"고 놀렸기 때문이다. 석씨는 지난달 오씨와 재혼했다. 영준이와 오씨 아들(6)은 새로운 형제가 됐지만, 현행 법률상 영준이가 오씨의 성을 따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준이가 '왜 동생과 나는 성이 다르냐'고 물을 때마다 차근차근 설명해주지만, 앞으로 이런 일을 얼마나 더 겪을지, 그때마다 영준이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막막해요."
■"부도나서 재산 지키려…" 위장이혼도 급증
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돼 있는 박모(여·48)씨는 서류상으로 아들(20)과 같이 살고 있다. 남편(49·공무원)과 97년 이혼했다. 그러나 박씨는 남편과 한번도 떨어져 산 적이 없다. 이른바 '위장이혼'을 한 것이다. 박씨는 1주일에 세 번씩 혈액 투석을 해야 하는 만성신부전증 환자. 투석을 한 지 12년 됐다. 남편이 버는 돈으로 한 달에 50만원씩 들어가는 치료비를 겨우 댔다. 하지만 아들 역시 만성신부전증을 앓기 시작하자, 박씨는 생보자로 등록해 국가에서 의료비 지원을 받기 위해 이혼했다. 폭증하는 이혼 속에는 위장이혼도 포함돼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나 있음직한 이 위장이혼은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며 "박씨의 경우처럼 위장이혼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부부생활 상담을 해주는 '부부의 전화' 권재도 목사는 "특히 남편 사업이 부도나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위장이혼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