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우리의 사랑의 모습은 ?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5. 3. 11:07

사랑의 키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00년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12만쌍, 하루평균 329쌍이 이혼했다.

 이는 1999년에 비해 1.7% 늘어난 것으로 혼인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70년도에 비해서 부려 10배가 늘어났다.

결혼은 모두 33만 4000쌍, 하루 평균 915쌍이다. 즉, 3쌍이 결혼하고 1쌍이 이혼한 셈이다.
주변의 신문, TV, 잡지 등에서 이혼에 대한 기사나 내용이 쉽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혼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에 따른 가정해체가 사회문제로까지 급부상되었기 때문이다.

이혼으로 인하여 자녀들의 탈선, 버려지는 아이들 이들을 주제로 다룬 여러 가지 TV 프로그램들이 특집으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처음 결혼을 할 때에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변치 말자고 약속을 하지만 함께 살다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론가 가버린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자. "아끼고 위하는 애틋한 마음,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는 일, 동정하여 친철히 대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마음, 육정적, 감각적이 아닌 동정, 긍휼, 구원, 행복의 실현을 지향하는 정념"

인터넷 전자 사전에서는 "이성(異性)의 상대에게 성적(性的)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

드물게, 좋아하는 상대를 가리키기도 함.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위하는 마음의 상태. 자식이나 제자가 부모나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함. 남을 돕고 이해하고 가까이하려는 마음. 사람이 가치 있는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단어를 잘 해석해서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적인 것이다. 감정은 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의 일회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을 볼 때에 혀를 차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표현하는 사랑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얼굴은 무표정하고 입술로는 땍땍거린다면 상대방은 사랑한다는 것을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거나 무슨 좋지 않는 감정이 있는 것으로 안다.

스스로 상대방에게 불친절하고 딱딱한 감정을 보이고 나서 다른 곳에서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일이다.
사랑은 표현해야 한다.

그 사람이 알도록 해야 한다. 감추는 것이 미덕인 세상은 이미 지나갔다.

 예수님은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표현하여 주셨다.

죽음 앞에서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에 제자들을 위하여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을 모아놓고 함께 만찬을 하셨다.

 떡과 포도주를 떼면서 함께 저녁을 드셨다.

우리는 이를 본받아 성만찬의식을 행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의 형식적인 모습이다.
기독교는 형식을 떠나서 내용만 중요시하지 않는다. 형식, 의식은 기본이다.

의식이 없이 내용만 있는 것은 내용물만 있고 그릇이 없는 음식과 같다.

 그 음식을 담기 위해서는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 중요하다.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다.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말안해도 되고, 표현하지 않아도 아는 말은 옳지 않다.

사랑한다면 표현해야 하고 하나의 형식, 표현방식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의식을 행하셨다.

사랑을 위하여 표현해야 한다.

 

 

 낮아지는 사랑

사랑 앞에서 교만할 수는 없다. 누가 잘나고 못났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바닥까지 낮아지는 것이다. 낮아지면서도 스스로가 낮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신분을 따질 필요도 없고, 체면을 따질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을 위하여서 나는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마음이 참된 사랑의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시면서 '내가 왜 이렇게 낮은 자리까지 오게되었나' 비탄해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질고를 당하시면서도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되었나' 원망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죄인들을 위하여 가장 더러운 발까지 씻게 되었다고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너무나 많이 사랑하시어서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높고 낮음을 따진다면 이미 그것은 사랑과는 먼 것이다.

체면을 따지고, 형식을 따지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다면 이미 사랑이라는 것은 물건너간 것이다.

사랑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스스로 낮아져야겠다고 굳게 결심을 한 후에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우리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둠으로 가득차 있는 방 안에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저절로 없어질 수밖에 없다. 빛이 없는 곳에서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을 물러나게 된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차면 우리 마음 속을 채우던 교만과 형식과 위선과 체면과 위엄은 저절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굴욕이나 치욕도 사랑 앞에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영광이나 명예도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게 된다.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실천하는 사랑

 

성경 요한복음 13:4∼5 말씀에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라고 예수님의 실천하는 사랑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겉옷을 벗으셨다.

사람의 겉옷은 남에게 화려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체면을 입는 것이며, 나타냄을 입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일터에서 겉옷을 입고 일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겉옷을 벗어야 한다.

겉옷을 입은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
겉옷을 입은 상태에서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몸소 그를 위하여 헌신하고 땀을 흘리지는 못한다.

 겉옷을 벗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겉옷만 벗고 형식적으로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허리에는 수건은 두르지 않고 형식만 두른채로 폼만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끝날 때까지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사랑을 위한 실천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쩌다 한번으로 끝나는 사랑과 봉사가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실천해야 한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요 13:1).

예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요일 3:16)

예수님의 사랑은 목숨을 버린 사랑이다.
사랑의 본체가 되어주신 예수님은 의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표현하셨고,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고, 씻은 발을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사랑에도 책임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내가 하고싶으면 시작하고 하기 싫으면 끝장내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하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실천하자.
사랑의 본질도 모른체 책임없는 사랑에 멍들어가는 이 사회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하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