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남을 대접하라 - 마 7:10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다가 보니까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늘 자기 위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데, 남이 나를 비판하는 소리는 귀담아 듣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행동하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비판하고 맙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는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일만 달란트를 빚졌고 또 한사람은 백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어서 그를 관가에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관가에서 풀려 나가자마자 백 데나리온 빚진 채무자를 찾아가서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뒤흔들었습니다. "너 이놈! 못된 놈! 왜 빚을 갚지 않는 거야! 너 같은 놈은 감옥에 처넣던가 뜨거운 맛을 좀 봐야해"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땅에 무릎을 꿇고 애걸을 합니다. "곧 빚을 갚을 테니 이번 한번만 용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사정을 했지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은 그를 데리고 가서 고발하여 결국은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고 했는데 도대체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 금액인가?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바친 세금의 총 액이 연간 800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란 유대인들이 로마에 일년동안 내는 세금의 12.5 배나 되는 돈이라고 하니 이것은 천문학적인 숫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엄청난 탕감을 받아놓고도 불과 일백 데나리온(우리 돈으로 약 500만원 정도)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고발해서 그를 감옥에 처넣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남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면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가르침 중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위대한 성현들도 이와 비슷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의 랍비였던 힐렐이라는 사람은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동양의 성현인 공자도 "기소불욕 물시여인(己所不欲 勿施與人)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내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들은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가르침인데 비해서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적극적인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소극성에서 벗어나서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적극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황금률의 말씀이 일반적인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보편적인 생활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황금률이 일반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백미(白眉)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황금률이 신앙과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12절 후반 절에 보면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했습니다. 황금률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통틀어서 한마디로 우리의 믿음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황금률의 가르침이 곧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랑 아닙니까? 결국 우리가 남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남을 먼저 대접해주는 적극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말씀이 결국은 남을 대접하는 일이요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남이나를 대접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남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의 이기적인 모습을 꺽어버리고 먼저 남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대접하면 이 사람도 나를 대접하겠지!"하고 속으로 계산하지 말고 무조건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그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러한 황금률의 가르침은 아주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낮아지고, 먼저 대접하고, 먼저 이해하고, 먼저 참여하고, 먼저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남지 아니하고 바벨론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발강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고통 가운데 함께 참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나서 에스겔은 희망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대접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함께 경험하고, 몸소 참여하고, 내 몸으로 느껴보고 난 후에야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고통의 자리까지 내려가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론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네가 몸소 내려가고, 낮아져서, 그의 고통을 너의 고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남을 대접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옆에는 자그마하게 만들어 놓은 흑인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흑인의 동상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습니다. 흑인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동물을 팔아먹듯이 팔아먹고, 죽을 때까지 노예로 부리다가 이용가치가 없으면 죽이거나, 내다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 죄책감으로 느껴집니다. 백인들이 얼마나 이 흑인들을 학대하고 동물처럼 여겼는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아프리카가 발견된 지 수 백년이 되었는데도 이 긴 세월동안 우리 백인들은 흑인들을 동물 차원에서 대접해 오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곧바로 돌아와서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자기 부인은 간호학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이제까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짐승 대접을 받고 살았던 흑인들을 위해서 나의 평생을 불태우리라! 생각하고 그는 자기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에 들어갑니다. 지금의 카메룬이라는 곳에 병원을 짓고,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전하며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가 바로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슈바이처는 교수였습니다. 오르겐을 칠 줄 아는 음악가 작곡가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요.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지만 오직 남을 대접하는 일에 자신의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불사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대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그의 생명을 다 바친 성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링컨이나 슈바이처와 같이 그렇게 큰 일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도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입니다. 너무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체의 양보도 없습니다.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의 우물 밖에는 모릅니다. 우물 밖은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우물 안에서 보는 하늘은 동그랗다는 생각 밖에는 못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 자신의 생각보다 더 훌륭하고 큰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좀더 넓게 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줍니다. 막혔던 시야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물 속에서 나와서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탄생부터 인간의 고통과 삶을 체험하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의 자리로 내려오신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높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한가한 곳을 찾아다니실 만큼 피곤하게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있다 할지라도 병자들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해오면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의 대접하시기 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고통을 당하시고, 친히 굶주리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친히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이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친히 십자가의 고통까지 이겨내신 것입니다. 사흘 동안 무덤의 권세에 사로잡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남을 대접하려고 하는데도 잘 되지를 않습니다.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장에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남의 입장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이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주장합니다. 상대방도 자신만큼 모르는 것이 아닌데 온통 세상 모든 것을 혼자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 모든 행동들이 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고 남을 먼저 대접하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황금률의 말씀은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거듭나야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불타 올라야 우리가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처럼 나는 매일 죽고 그리스도는 살아나는 회개의 눈물 속에서만 이룰 수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