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 마 16:21∼24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4. 23. 12:26

마태복음 16장에는 예수님의 이적은 하나도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들이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메시야 사역을 완결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래서 본장에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예언과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교훈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베드로)을 매우 칭찬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까지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지 말도록 만류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만류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을 방해하려는 "마귀의 꾀임"에 이용당한 결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기 위해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고까지 책망하신 것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오늘날 우리들도 인간적인 정(情)이나 이해 관계 때문에 사실을 왜곡할 때가 있다.
심지어 신앙마저 변질시키고 불의와 타협하려고 할 때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성도들은 명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믿음의 눈으로 살피고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잡혀 매맞고·죽임당하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길은 "고난 없는 삶의 길"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 왕으로 등극하여 로마 정부를 몰아내고, 다윗 왕국을 건설하실 줄 알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고난받고 죽임당한다 하실 때 "그리 마옵소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이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고난 없는 삶의 길"만을 생각한다.
우리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434장)이다.
우리 성도들이 좋아하여 즐겨 암송하는 성구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간증을 하면서 이렇게 믿었더니 사업이 잘되고, 부자되어 복받았다고 말한다.
그 결과 고생하고·핍박당하고·부자가 못된 사람들은 "예수를 내가 잘못 믿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만사형통만 원하고, 고난없는 예수를 찾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편리주의·안일주의에 빠져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이것 저것 간섭받는 것 싫어하고,
세상의 편리주의에 따라 어떻게 하면 예수도 좀 "쉽게·편히 믿을 수 없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만일 어떻게 하면 고난없는 예수 믿을까?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좀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까?를,
연구하고 있다면 이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길은 "자기 희생의 길"이었다.
예수님에게도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만류하자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슬퍼하며·기도하셨다.
십자가는 생명을 포기하는 길이다.
의인을 포기하고 죄인되는 길이며,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길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기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우리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며,
그저 편하게·그저 쉽게 살기만 원한다면,
이는 불신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우리가 가는 그 길이 희생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길인줄 알아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까지 인도하여 함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태도와 그 조건에 대한 말씀이다.
한마디로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척 하거나,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를 통솔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완전히 정복해 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살려고 하니 번거롭고·어렵고·좌절하고·실패가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능과,
무기력함을 알지 못하고,
내가 가장 강한 자요,
능력있는 자로 착각한다.
뿐만 아니라 "나"를 버리지 못하여 내 자신이 주인이 되고, 결국에는 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오만해지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
나 자신이 주인이요, 하나님과 주님은 나를 돕는 조수일 뿐이라고 생각하므로 하나님이 내 일을 도와주시는 것을 "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이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세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몸부림치며,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이런 때는 하나님과 주님이 외면하고 멀리 계셔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므로 아무리 애를 써도 은혜있는 생활이 못되고,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으로 살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에게 있는 부패한 인간성으로부터 나오는 "욕심·탐심·교만·허영심·시기심·정욕" 등을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비워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올바른 일군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하고(고전 9:26∼27), "자신을 날마다 죽이노라"고 하였다(고전 15:31).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의 교만과도 싸워서 이기었고,
자신의 정욕과도 싸워서 이겼으며,
이 세상의 부귀영화의 유혹과도 잘 싸워 승리하였다.
이처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는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최고로 여기며, 주님의 말씀에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讀)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의 생명을 주님의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모든 것(생명까지)을 즉시 드릴 수 있는 자세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헐벗고 고난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심지어는 생명까지 잃은 사람들이 많다.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다.
주님은 외롭고 쓸쓸하신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이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은 정말 주님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위해 그 어떤 수치와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고,
오직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이다.
결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를 목이나·귀나·옷에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이익을 위해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서도 조그마한 일에도 곧잘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불쌍한 자들이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구원 행위를 모독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버리고 하늘 나라의 영원한 가치있는 것을 붙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무가치한 것을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함이다.
인간의 생명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자들은 이 생명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부패된 인생으로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귀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고난의 길일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게 순종하며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고 있는가?
만약 십자가를 자랑하며 산다면 그 이유가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이익 때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받는 수치와 고난과 모욕과 비난과 매맞음도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여기는 믿음 때문인가?
우리의 생명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대신 사신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더 이상 '나'는 없고,
'주님'만이 나타나는 삶의 태도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