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자 예수
히브리서 7:25,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여기서 구원이란 단어는 "소조"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치유하실 수 있으니"라고 읽을 수도 있다. 죄인은 무조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니다.
그를 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셔야 한다.
이것은 아버지와 교제가 끊어진 자들에게도, 사탄이 그 몸에 병을 얹어놓은 자들에게도 다 해당된다.
이제 그가 교제에 돌아왔고 예수는 위해서 기도하신다. 이것은 요한일서 2:1과도 전적으로 부합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병이 어떻게 왔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주신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 부류의 치유 받은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승천하실 즈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게 하려고 제자들을 보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기 위해 보냈다.
사람이 중생하고 성령을 받는 즉시 말씀의 제자가 될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신약은 아직 기록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을 보라.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막 16:20)
이것은 어떤 특별한 믿음을 말한 게 아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일 뿐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기 병 나은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다.
불신자들이다. 병자 고치는 것이 전도 사역중 한 부분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선전이요 광고이다.
20절을 좀 더 살펴보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이 표적은 신자를 위한 게 아니었다.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치유의 첫 번 표적은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창문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던 유두고를 제외하고는 신자들의 병 나은 게 별로 나오지 않는다. 병 나은 사람들은 옛 계약 아래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선전 방법이셨던 것이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야고보 5:14에 나온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서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를 주목하라. 여기에는 우리 가운데 병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고 말씀의 빛 아래 행한다면 그의 채찍으로 인해 나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1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 자라나지 않는 신자가 있다. 말씀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특권을 사용할 줄 모른다. 바울이 말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여기에는 영적인 성장이 없다. 말씀 충만한 삶도 없다. 이들이 야고보가 말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각에 지배되는 신앙을 가졌다. 도마와 같은 신앙이다. "내가 그를 만나보고 그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본다면 믿겠노라."
그러나 예수는 말씀하신다.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이것이 계시적인 믿음이다. 다른 믿음은 물질을 믿는다. 보고 듣고 만지면 믿는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라. 장로가 병자의 방에 들어온다. 병자는 그를 본다. 장로가 기도하는 소리를 듣는다. 자기 머리에 기름 바르는 것을 느낀다. 이 기도는 병자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장로의 것이다. 그것이 병자를 고친다. 주께서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속에는 살아있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의존해 감각으로 지배되는 신자의 그림이다. 히브리서 5:12∼13,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온전하게 성장한 신자이다. 병이 오면 그는 병이 예수에게로 옮겨졌음을 기억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기에게 역사함을 거부하는 것임을 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이 부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한다. "아버지 내 병이 예수께로 옮겨졌고 그가 짊어지심을 감사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