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은혜

주를 앎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4. 21. 16:52

"내가 믿는 이를 나는 안다." 바울의 도전적인 말이다. 그는 예수를 알았다. 고린도후서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요한이나 베드로처럼 예수를 알고 있지 않았다.
요한과 베드로는 바울처럼 알지 못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삼 년간  함께 있었기에 주를 알았다. 그러나 참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죄를 짊어졌기에 그 비극이 일어남을 몰랐다. 그저 외형적으로 발가 벗겨지고 몸에서 피가 흘러내림을 본다. 가시 면류관에 찢겨 얼굴이 피로 덮인 것을 보았다.
그들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가 죽어 가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들을 위해 죄가 되었음을 몰랐다. 그 시간에 진행되는 영적 대전투를 몰랐다. 귀신들이 그의 아름다운 영을 끌고가 저주받은 인간들이 있는 감옥에 넣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사람의 모습만 볼뿐이었다.
예수의 세 모습이 있다.
첫 번 것은 사랑이 지배하는 그의 지상 삶이다. 그것은 사랑이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4:23∼25, 그는 시험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많은 병자와 상한 심령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예수는 그들을 고쳐주었다. 8장에 몇 개의 기적이 기록되었다. 말씀으로 백부장의 종을 고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 다음에 배에서 일어난 장면이다. 사탄은 배를 침몰시키려고 한다. 무서운 폭풍 속에 그는 조용히 물을 향해 말했다. "잠잠하라." 그는 바다를 지배했다. 바람도 지배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죽어서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냈다.(요 11:17∼44) 누가복음 5:4∼11에는 그가 바다의 고기를 지배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연의 모든 법칙을 지배하였다. 완전한 주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상에서의 주의 삶과 가르침의 한 면일 뿐이었다. 아무도 그가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가 가르친 것처럼 가르칠 수 없었다. 그의 말씀들은 산처럼 서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내가 온 것은 너희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버지를 소개하고 보여주어도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 없었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새피조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가르쳐지지 않았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중생 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중생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얼떨떨한 상태였었다. 요한복음 3:3∼8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새피조물이 될 필요를 말하는데 그침을 알 것이다.

찬송의 대부분은 그의 지상 삶에만 관련되어 있다. 아주 적은 분량만이 그가 아버지 우편에서 현재 하시는 일이나 그의 대속적인 사역을 설명한다.
십자가에 관한 찬송을 발견하지만 사실상 그의 육체적인 고통만을 말할뿐이다. 육체적 고통만으로는 죄문제를 다룰 수 없음을 안다면, 그리고 지상의 삶과 가르침만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안다면 그를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모습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이다. 주위에서 예수가 못박혀 죽어있는 십자가상을 본다. 교회 한 부분은 죽은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다. 예수의 지상 삶은 아무도 구할 수 없었다. 또한 죽은 그리스도 역시 아무도 구할 수 없었다. 만약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면 아무도 그를 통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아무도 새로 태어나거나 새피조물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십자가로 가까이" 찬송을 부른다. 그러나 십자가는 구원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실패의 장소이다. 죽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 죄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장소이다. 그를 죄로 만들었기에 등을 돌리신 것이다. 사탄이 자기를 삼년 반 동안 지배했던 사람에게 분명한 승리를 보여준 장소이다. 우리가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라고만 한다면 실패와 패배로 이끌라는 의미이다.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도나 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 말을 듣고 놀라는 사람이 많으리라. 그런 사람들은 죽은 그리스도를 예배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치고 더 이상 가지 않았더라면 실패로 마쳐지고 말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육체적으로 주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 주위에 모여 그가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예수의 모습은 인류에게 생명과 빛을 주고 있다. 부활하고 승천해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이다. 바울 계시에서 보인 대속을 잠시 살펴보자.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그 무서운 드라마의 첫 단계이다. 그가 죄가 된 것이다.
히브리서 9:26,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십자가는 두 시대가 만나는 장소이다. 또한 옛계약과 새계약, 두 계약이 만나는 장소이다. 거기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신성이 인성을 위해 죄가 되셨다.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원은 "위엄의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히브리 10:10∼15에서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것은 "단번"의 대속이요 그로 인해 오는 "단번"의 지배이다. 다음으로 11절이 예수를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