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와 진리

종교의 본질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5. 4. 13. 10:48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림에 있어서 지금까지 수많은 이론들이 있어 왔고, 때로 어떤 것은 서로 모순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종교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가장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져 왔고 지금까지도 혼란스러운 논의들이 전개되고 있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정의들이 제시되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타고 종교에 대한 어원학적인 연구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일이라고 공공연하게 교육되어져 왔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왔던 것이 현실이었다.
한 예로 루이스 벌코프라는 신학자는 '조직신학 상권' 108쪽에서 종교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라는 말의 어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으며, 설령 확실하다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규범 정의가 아닌 단지 역사적인 정의만을 제공해 줄 것이며, 이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게 만든 종교의 개념에 약간의 빛을 던져주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의 저서 '기독교 교리 요약' 9쪽에는 "영어에서 종교(religion)란 말은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 영어 성경에는 갈1:13, 14, 약1:26, 27 네 곳에만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의 위 네 곳을 살펴보면 종교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루이스 벌코프의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정확한 교리의 정의와 성경에 기초한 해박한 신학지식, 그리고 교회중심의 신학처리는 오늘날 개혁주의 노선을 걷는 후학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벌코프의 신학이 성경을 능가하는 (카논, 자, 척도)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은 단순히 기존 신학의 변호나 보수에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비추어 부단한 발전을 거듭하는데 그 특색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벌코프의 주장처럼 종교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초기헬라어(2000∼900 B. C.)와 고전헬라어(900∼330 B. C.)에서는 거의 채택되고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330∼AD330)에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루이스 벌코프가 종교의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서 근거로 제시한 위의 본문 중 갈1:13과 갈1:14에는 '유대교'를 뜻하는(유다이스모스)의 여격(유다이스모)가 사용되어 있으며, 약1:26, 27에는 '경건'이라는 의미의 (드레스코스)와 (드레스케이아)가 각각 사용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을 나타내주는 단어들이 아니며, 흔히 종교라고 이해되어온 (유세베이아)와 (데오세베이아)라는 단어들 역시 종교의 본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봐야한다.

  (유세베이아)가 '종교'라고 번역된 곳은 신약성경에서 단 한 군데도 없으며 모두 '경건'(행3:12, 딤전2:2, 3:16, 4:7, 6:3, 5, 11, 벧후1:3 3:11, 딛1:1)으로 번역되어져 있다.         

(데오세베이아) 역시 '종교'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함'(딤전2:10)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종교'라고 번역되어 종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행25:19 베스도가 하는 말 중에서 '종교'라는 단어로 (데이시다이모니아스)가 나타난다.              

(데이시다이모니아스)는  (데이시다이모니아) 가 격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두려운, 겁먹은'이라는 뜻을 지닌 (데이시)라는 단어, 곧 동사가 되면 '두려워하다'의 뜻인(데이도)와 '귀신', '악마'를 의미하는  데몬 의 복수 명사 (다이모니아, 귀신들)의 합성어이다.
문자 적인 의미대로라면 종교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데이시다이모니아)는 미신으로 오해되어 종교로서의 경건이나 신들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으로서의 경건을 의미해 왔다. 문제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신학적인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사단이니 귀신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라는 단어 역시 귀신들과 관계됨이 분명한데도 되도록 귀신과 연관시키는 것을 꺼려해 온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는 '귀신들이 두려워 겁먹음으로써 그 비위를 맞추는 모든 행위'로 정의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와 더불어 행17:22에는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하는 말 중에 '종교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로서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가 사용되어 있다.
'종교성 즉 종교적인(신앙심이 깊은)'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라는 명사의 형용사  (데이시다이모네스테로스)이며 행17:22에는 이 단어의 복수 목적격 비교급이 쓰임으로써 '더 종교성이 있는'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행17:22의(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는 '더욱 더 귀신들을 겁내는 or 더욱 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이라는 뜻이 된다.

결론적으로 부모 잃은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부모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종교란 창3장 사건 이후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자녀로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어두워진 인간이 절대자를 만나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 사단과 귀신들이 혼미하게 역사한다(고후4:4).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기본이 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교회생활을 한다든지, 아예 미신을 섬기거나 타 종교단체에 드나드는 모든 종교적 행위에는 반드시 사단과 귀신이 관여하게 되어있다. 즉 왠지 모를 두려움에 누군가(특히 귀신들) 절대자를 숭배하여 의존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까지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복음이 아닌 종교생활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인간을 위로하거나 참 행복을 가져다 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구원과 위로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길만이 참된 성공을 보장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 전부터 계획되어진 자기 몫의 인생을 바로 살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