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메세지

묵상을 위한 창세기 읽기(창4:1-15)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7. 11. 24. 00:37

누가 형제자매를 지키는 사람인가?" (창 4:1-15)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더럽고 추한 이야기, 침울한 이야기,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왜 나는 내가 가인과 아벨 둘 중의 하나의 후손이라고 믿어야만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은 영원한 라이벌, 원수지간의 가문 가운데 한 쪽에서 태어나는 비운을 지닌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됨의 불행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세 번째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창 4:25)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아마 우리는 셋의 자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이 이야기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6.25와 같은 불행한 전쟁에서 형제가 형제를,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죽이는 이야기들입니다.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언제나“자기의 형제”를 살인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자는 누구든지 결국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바로 이 말속에,“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다”라는 성경적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이면에는“당신은 당신의 형제를 지키는 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인류적 공동체의식을 가진 사람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는가?”(창 4:9)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은“나는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마침표가 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묻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나는 알지 못하나이다.”끝에 나오는 마침표를 제거해보십시오. 히브리어에는 물음표나 마침표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디에서 한 문장이 마치는지는 해석의 문제입니다.“나는 모릅니다”라는 문장 끝에 나오는 마침표를 제거하면, 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됩니다.“나는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헛됨”“허무”“무상함”이라는 뜻을 지닌 아벨은 인생무상, 삶의 헛됨을 보여준 전형입니다(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 전도서입니다. 구약성경전체를 통틀어 70번 정도 나오는 이 단어는 전도서에서만 35번 등장합니다!) 그것도 자기의 형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가인의 죄는 그가 피가 없는 곡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양을 잡아 드린 피의 제사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는 피의 제사에 대한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의 제사에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불순한 요소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7a절). 드려진 곡물이 아니라 가인의 마음 안에 더럽고 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가인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가인은 받아들여진 아벨의 제사에 대해 너무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선함”을 견딜 수 없어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무서운 죄였습니다.  

가인에게 내려진 형벌은 앞장에서 여자에게 내려진 형벌과 비슷합니다.“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라”(7b절). 죄는 마치 성욕이 불타듯이 그렇게 너에게 달려들 것이고, 너는 그것을 네 마음대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죄에 휘둘러지는 삶, 이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