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양하라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145:1-5, 8-9절
시편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란 표제어를 갖고 있는 마지막 시로서 구성 형태나 문학적 표현 형식, 그리고 영적인 내용에 있어서까지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 시의 우수성 때문에 유대인 가운데는 '누구든지 시 145편을 진심으로 하루에 세 번씩 암송하면 그는 복을 받을 것이며, 내세의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점심 식사 때 이 찬송시를 낭독한 것이나 유월절 행사 때 본 시의 15절을 사용한 점 등은 이 시가 얼마나 많이 애송되고 있었는가를 증명한다.
이 시는 '이합체시'로서(각 행의 첫 글자를 모아 놓으면 알파벳순서와 같이 되도록 하는 것) 문자적인 대구 용법을 목적으로 하는 것 이외에도 기억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시편 145편은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그러한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시인의 찬양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존귀하심이 광대하십니다.
인생의 존귀함은 순간적입니다. 또한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인생은 본래 죄로 인해 더러움 가운데로 버려진 비천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존귀함이란 그 어떤 모양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존귀함을 얻기 위해 물질을 구하고 권세와 명예를 좇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존귀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생의 존귀함은 인위적요 순간적이며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 스스로 존귀하게 느끼고자 하는 교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귀도 아니며 인위적 방법으로 취하신 교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귀는 스스로 영원 전부터 소유하고 계신 절대적 존귀입니다. 끝이 없이 무한하고 광대하시며 결코 변하거나 손상됨이 없는 그러한 존귀, 이것이 바로 인간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존귀입니다.
그의 영광스러운 위엄이 광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곧 그의 공의로우심을 뜻합니다.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분께서 위엄을 나타내실 때는 죄악을 범했을 때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의 엄위로우심은 죄를 미워하시고 보응하시는 그의 공의를 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엄이 광대하시다는 본문의 표현은 그의 공의로우심에는 조금의 죄악도 용납이 안 됨을 의미합니다. 죄인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보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그분이지만 죄악은 조금도, 그리고 어떠한 유형의 것이라도 허락지 않으시고 보응하신다는 것이 그의 '광대한 공의로우심'이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생에게서는 참된 공의, 완전한 공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와 결탁하기를 좋아하고 공의를 빙자한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공의와 정의를 꺾어버리는 사악한 자들입니다. 약한 자를 보호하며 억울한 자의 신원을 시원스레 풀어 주어야 하는 법과 정의가 도리어 특수 계층의 부당한 야욕과 더러운 탐욕을 변호하는 시녀로 전락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공의와 정의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생의 공의는 더럽고 추하며 가변적이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정의로우며, 크고 위대하며, 의인의 고통을 신원하여 주시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진정 '영광스러운 위엄'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행하신 기사와 능력이 광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그의 행하신 기사와 능력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말씀으로 6일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흙으로 인생을 창조하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주님,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고, 인간의 교만의 상징이었던 바벨탑을 허물어뜨리신 그 하나님, 애굽에 열 재앙을 쏟아 부으시고 홍해를 가르시며 물을 내신 그 하나님의 능력은 너무나도 크고 광대하여 인간의 이성이나 생각, 심지어 상상으로조차 측량하기 어려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사보다 더욱 크고 귀한 능력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시고 원수 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의 기적의 광대하심입니다. 그의 능력은 크고 무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부터 그에게 감사함을 돌리는 이유는 그러한 그의 무한하신 능력이 그의 자녀 된 우리를 위해 역사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을 향해 하늘 보좌를 박차고 일어나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역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광대하심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광대하심은 성도의 찬양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신 그분의 존귀가 바로 그의 자녀 된 우리의 존귀가 되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천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창조주의 공의로우심과 은총이 임하므로 우리는 찬양해야 하고, 홍해를 가르시며 죽은 자를 그 누웠던 자리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우리를 위해 역사되어진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주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찬양은 끊이지 말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그의 광대하심을 깨닫는 한 우리는 힘껏,
최선을 다해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비천한 자리에서 존귀한 자리로 올리어진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의 능력을 힘입은 성도들이 행해야 할 유일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