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와 진리

회개에 대하여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10. 19. 10:04

회심에 대하여

 

구원에 이르는 후회 또는 회개(poenitentia)는 복음에 따르면 이전의 우리 죄의 상태 전반을 반성하면서 부끄러워하고 그와 동시에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자연인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런 후회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회심을 의미한다.        

후회는 지금까지 어두움의 영역 속에서 따르던 것으로부터 생각을 돌려 하나님과 빛 가운데 있는 그 분의 복된 사역을 감당하는 쪽으로 행하는 것이다(행 26:18). 
후회는 사실상 단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 다른 의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속에 회개의 사역을 시작하였고 앞으로 그것을 완성하실 분이다(빌 1:6; 2:13; 살후 1:11).

따라서 행 11:18, 딤후 2:25에 나오는 회개(후회)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표현되었지(제 2헬베틱 고백서 14)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한 사역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회개(생각이 바꾸어짐)는

① 우리의 현재의 절대적 죄 타락 상태를 주지하지 않고는, 그리고 타고난 죄와 자범죄를 율법을 통해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고는(agnitio peccati)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② 또 이 회개는 이전의 부끄러운 삶에 대한 마음의 슬퍼함(contritio cordis)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③ 마지막으로 이 회개는 고백하지 않고는,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는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에 대해 범죄 했음과 또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마땅히 받아야 됨을 큰 소리로 고백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눅 7:37-50; 15:21; 11:4; 18:13; 요일 1:9; 약 5:16; 시 32:5; 루터의 소요리 문답서 327쪽).
사실 구원에 이르는 부르심에(Berufung)은 이미 믿음과 후회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돌아섬"(회심)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눅 1:16-17; 말 3:24; 행 3:19; 11:21; 15:19; 26:18; 고후 3:16).


"회심"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속사람(이성, 감정, 의지)에게 역사하여 믿음과 후회(회개)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돌이키시고, 설득하시며 지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자주 외치던 말인 "회개하라"가 목표로 삼는 내용이다(사 45:22; 55:7; 10:21; 31:6; 애 5:21; 렘 26:3; 31:18-19).

포로 중에 있던 백성이 포로에서 벗어나 성령께서 지배하는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의 본래의 고향이 있는 바로 그 곳 즉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회심 과정에서 설득하시고 정복하는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렘 20:7).


이 회심과정 속에는 인간이 진작시키거나 제어할 수 있는 그런 인공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침례교와 감리교는 회심 사건이 약간의 펠라기안적인 요인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스스로 회심한다는 것은 스스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데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돌아서게 하도록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해 후회하는 일은 필수적임이 드러난다.

회심에 대한 다른 유사한 표현이 있다: 즉 회심은 어떤 확실한 시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회심과정은 천천히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방해요소들이 가로막아도 마침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심은 중생으로도 표현된다(요 3:3; 딛 3:5; 요 1:13; 벧전 1:23; 약 1:18).

회심 또는 이 회심과정에는 하나님만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인간도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나,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인간을 추진하는 경우에서만 그러하다(롬 8:14).

마치 아기가 태어날 때 부모가 그에게 부여해 준 힘을 사용해서 나오듯이 중생 때 인간도 그러하다.
겔 16:6에 보면 부르심은 어떤 한 시점 속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성경구절에 보면 회심이란 옛 삶의 상태로부터 나와서 새로운 삶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 기사를 보면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의 상태에서 사망의 상태 속으로 빠져들어 갔는데 회심은 이와 정반대 현상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다시 한번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야기시키신다.

그래서 이 빛이 인간의 마음 속에 비치게 하셨다(고후 4:6).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순간에 우리 마음의 어두움 속으로 "빛이 있으라"고 부르시니 빛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회심 과정을 밝히는데 또 다른 회심의 동의어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간 속에 역사 하여 일으킨 것을 밝히시는 것에 대한 좋은 표현이 있다.

바울의 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는 말은 여기에 속한다.

나아가 이런 연합관계 속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회심인 것이다(갈 6:15). 엡 2:10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만드신 바이며 선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선한 사역 가운데서 행하시도록 준비하셨다.

요 5:21에 따르면 회심은 새로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엡 1:19-20; 2:1, 5-6).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관점도 회심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 속에서 행하게 되는데 이것도 회심에 대한 설명이다(롬 6:4-9; 갈 2:19-20; 골 3:9-10; 엡 4:22-24).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아담 때문에 벌거벗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다시 옷입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회심에 대한 설명이다.


인간이 아담과 연관되어 있는 한 그는 '옛 사람'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 아래로 들어오면 "새로운 인간"으로 불리어진다.

바울 사도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으로부터 유래되는 삶의 상태, 즉 옛 사람의 상태를 벗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 피조물 속의 어두움 속에서 즉 첫 아담의 예하에서 벗어나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왔는데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골 1:13).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옛 아담 아래에 있지 않고 새로운 둘째 아담 아래에 있는데, 이 둘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바른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간주된다.


회심에 대한 다른 그림은 "ajnakainwvsew""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중생을 의미하는데 성령을 통해 일어난다.

세례가 "중생의 씻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딛 3:5).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마지막으로 회심은 마음속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으로 표현된다(겔 11:19; 36:26).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돌과 같이 강퍅한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롭고,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
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 11: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위에 언급한 모든 그림들은 회심의 능력과 그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회심은 인간의 마음에 돌아서 달라고 피상적으로 청원하는 것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즉 회심이란 단순히 마음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또는 설득력을 통해 마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Persuasio moralis).

이 부르심은 창조적인 사역의 특성을 띤다.

즉 이 부르심은 인간 속에서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역이다.

이 부르심은 인간에게 생명의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일깨워 준다.

이 부르심은 인간이 죽은 자인 것을 전제한다(엡 2:15; 롬 2:15).  

   
이 부르심은 성령의 장중에서 완성되는데 성부께서 우리를 능력 있고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아들에게 이끎을 통해 이루어진다(요 6:44,65).

우리는 여기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첫 창조의 경우처럼 재창조에도 함께 역사 하심을 보는 것이다.

성부는 아들에게 그에게 속한 자들을 주시매 아들은 이 사람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요 6:39; 10:28 이하; 17:12; 18:9).

회심이 하나님의 사역이지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행 11:28; 딤후 2:25-26; 마 19:26).


하나님은 단번의 이런 부르심에 근거하여 자주 그리고 항상 다시금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렇다 옛 사람은 날마다 죽고 새 사람이 날마다 다시 살아난다.

이전에 한번 일어난 회심 행동으로부터 인간을 돌이키는 새로운 행동이 야기되는 것이다.

일단 외적인 부르심 곧 아버지가 죄인들을 아들에게로 인도하시기만 하면 이런 이끄심은 중단되고 내적인 부르심의 역사가 일어난다.

즉 이 죄인들이 그 후부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먹고 살 수 있도록 역사 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