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지식"은 결코 단순하고 순수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인식의 최후 담보로 "자아"만을 남겨두고 모든 대상을 객관화시키고 타자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인식은 명석 판명한 지식만을 인정하여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함으로, 철저히 과학적이고 실험적인 지식만이 참다운 지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지식"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 믿음은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믿음과 관련된 지식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은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려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마음은 믿음을 도달할 때라도 그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에는 그 신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자체의 능력으로 지각한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에 의해서 얻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무한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모든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믿음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고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그는 여기서 종교적 관점에서 본 지식의 뜻을 가장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말해 주고 있다.
즉 이 지식은 현대의 복잡하고도 어려운 인식론적 객관성과 분석이 아닌 인간의 실존과 연결된 그리고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와 직접 연결된 지식이다. 따라서 칼빈의 "지식"은 현대 용어로 "실존적 이해"라는 말에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목차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칼빈은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신학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신론과 인간론을 구분해서 글을 전개하지 않았다.
즉, 먼저 신론을 다루고 나중에 인간론을 다루는 식으로 구분해서 글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들은 서로 떨어뜨려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으며, 이 두 교리를 중심으로 제1권의 주제와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칼빈의 관심은 하나님의 존재나 본질에 대한 사변적인 철학적, 신학적 관심보다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물음과 필요에 있었기 때문에 책의 서두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밀접하게 연결해서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어떠한 일을 하시고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시는 가에 대해서보다는 인간과 관련해서 어떻게 일하시는 가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상으로 일하시는 방식을 하나님 자신에 관한 추상적 사실들보다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참된 지혜에 관하여 칼빈은 다음의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칼빈의 신학의 한계를 결정해 주고, 그가 이후로 그의 글을 전개해 나가는 방법에 대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또한 각자 자신을 안다는 그의 말은 이 후로 모든 말들을 좌우하며, II권의 초두와 여러 부분에서 되풀이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그의 사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홀트롭은 『기독교강요』의 구조는 『기독교강요』에 담긴 많은 내용을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기독교강요』의 구조를 잘 파악하고 이해할 때 칼빈의 사상을 이루는 핵심을 발견할 수 있는 뜻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구성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헤르만 바우케(Hermann Bauke)는 1922년에 『칼빈 신학의 제문제』라는 책을 발표함으로 칼빈의 연구에 전환점을 만든다.
바우케는 칼빈 신학의 형식 속에서 칼빈 교리를 사실대로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즉 "이 형식이란 물론 단지 외적인 꾸밈, 문체, 배치, 구분 등이 아니라, 모든 신학 내용의 구성과 내적 형식과 더불어 그 노작의 포괄적이며 심오한 의미의 형식을 뜻한다.
바우케는 칼빈의 교리 안에 형식 구성의 세 가지 본질적 특징을 구분한다.
그 첫째는 합리주의이다.
이 합리주의란 내용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적인 합리주의를 말한다.
칼빈은 형식적인 변증법을 가지고 그의 신학의 내용을 지배한다.
둘째 특징은 '대립되는 것의 복합'(complexio oppositorum)이다.
즉 교리가 비록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서로 대립될지라도 형식상의 변증법에 의해서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셋째 본질적 성경으로서 바우케는 성경주의를 발견한다.
물론, 오늘날 바우케의 이론에 대한 여러 가지 반박과 비판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가 칼빈의 사상적 체계를 이해한 통찰력과 종합적 분석력은 매우 타당하며 정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기독교강요』를 처음부터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의 사상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는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모순되는 기독교 교리의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여러 신학자들과 기독교 종파들을 모두 아울러서 하나의 통일된 사상적 종합적 체계를 이루고자 했다.
따라서 칼빈의 글을 '대립되는 것의 복합'이라고 평하는 것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모순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지식들을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매끄럽게 표현하는 그의 표현력은 과히 당대의 인문주의의 훈련을 철저히 받은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칼빈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알아야 하고, 또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아주 모순된 말을 한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모호한 말을 한 것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철저하게 인간과 동떨어져서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신자의 현실적인 삶과 연관된 지식임을 밝히기 위한 그의 실존적 변증법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계속해서 따라가 보도록 하자.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풍요로운 축복은 현재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다음의 두 가지를 열망하게 한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가 부족한 것을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겸손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빈곤과 겸손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그 분을 알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초 인간인 아담의 범죄함은 우리들을 위를 바라보게 만들고, "공포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겸손과 자기 지식의 밀접한 관계성은 칼빈에게 있어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이다.
겸손이 없는 자기 지식은 교만이 되며 모든 잘못의 근본이다.
『기독교강요』 전체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칼빈의 큰 이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기 부정과 철저한 낮아짐에 의한 겸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자신의 비참함과 무지를 인정할 때,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