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지금 현재 전 세계에 복제 열풍이 불고 있고 인간복제에 대해 이런저런 논란들이 많다. 무엇보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최근들어 생명의 신비를 벗기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 나타나면서 생명을 조작하려 하고, 인공생명이라는 생명창조에 도전하고, 생명에 대해 생명 현상의 모의적 단계 또는 모의 생명이라는 말이 출현한 것으로 보이며 대용생명, 복제생명, 기계적 생명 등의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이 시점에 생명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이것이 인간배아복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정확한 기준을 삼는데 중요한 논제가 될 것이다.
생명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용생명, 인공생명, 복제생명, 기계적 생명 등 과학이 말하는 있는 이 모두가 생명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보는데서 출현한 말이며 생명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서 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을 분해하여 무생물과 다름이 없는 분자들로 집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눈물과 물을 비교했을 때 발견하지 못하는 요소,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요소까지 포함하여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구성분자들만 분해를 통해 얻어냄으로써 생명을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하려는 물질적인 풍토와 여기에 따라서 인공적으로 생명을 구성하려는 인간복제의 등장이 인간의 생명을 대치시킬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엄청난 물을 묻게 된다.
만일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예비 생명도 있게 될것이며, 생명 비축도 있게 될 것이며 생명을 매각하는 행위도 생기게 될 것이며, 생명을 계속 복사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경우도 생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공상도 아니고 단순한 과학소설도 아니면서 계속해서 도전해 오고있는데 그러한 인공생명의 가능성 앞에 우리가 새로운 자세로 생명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당위성을 가지고 우리는 생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서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기독교 윤리학적으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생명의 의미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보면 생명은 '살아 있다'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른바 생명을 갖고 있는 생명체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생명이 있을때에는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현실을 접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분해하여 그 구성 분자들을 살펴보는 전문가들이 아니더라도 우선 우리는 육안으로 보는대로 느끼는 대로 살아있는 현실을 만나게 되며 그 현실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살았다' 또는 '살아 있다'라는 말을 할수 있게 되며 그것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지, 얼마나 오래 사는지, 어떻게 하면 그 상태가 정지되는지 등 다양한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인식되는 생명을 우리는 일차적인 생명 또는 생물적인 생명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생물적인 생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해를 세심하고 깊게 접근하는데 동참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명이 지속되는 것을 수명이라고 하고 그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생명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건강관리와 같은 조어들이 생기며 그것에 대한 방법들도 찾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생물적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구별된 점은 그 생명은 하나님으로 부여받았으며 그것이 지속되는 기간을 차용한 시간이라고 이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생명이 있는 동안 생명의 본질을 규명하기 보다는 그 생명이 어떻게 지탱되어야 하고 어떻게 지속되는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장수라는 개념을 고려하기 보다는 주어진 생명의 기한과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을 지탱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이해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생물적인 생명은 '생명의 살아있음'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살아 있다면 그 살아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명령을 듣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단순히 이어가는 것이 아니고 의미있는 생명의 삶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은 '삶 또는 생활'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를 나타내 보이면서 자체의 의미를 아름답게도 만들고 추하게도 만들면서 역사와 문화라는 형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적인 생명을 기독교인은 생명의 전부라고 믿지는 않는다. 아마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유할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항상 먹고 마시고 자고 숨쉬는 것 외에 그 무엇이 분명히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서도 암시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영혼은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적이며 생물적인 생명에 대조되는 생명의 다른 이름으로서 인간에게 고유하게 있다고 주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말하며 영혼은 동물에게는 없으며 사람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과 동물의 구별이 여러 가지로 될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영혼이 있고 없는데서 사람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과 동물의 구별이 여러 가지로 될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영혼이 있고 없는데서 이루어진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서 영혼은 단독으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개념을 형성할 때에는 떼어서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렇게 떼어서 생각할수 없다. 그래서 사람을 영육합일체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영과는 구별된다. 영혼과 영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따로 떼어서 생각할수 없는 것이다. 영혼과 영은 기능적인 면에서 구별되지만 구성 요소로서 인간의 한부분을 독점적으로 차지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영혼은 육체적인 생명, 즉 생물적 생명과 연합하여 인간을 이루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명을 지탱해가는 중요한 요소로 나타내지만 영은 하나님을 만나는 신적인 요소로서 생물적 생명의 세계와 구별된다. 영은 인간에게 있어서 질적인 문제도 아니고 양적인 문제도 아니다. 영은 하나님과 연계되어 다른 차원을 발견하게 하며 결코 육신적 죽음이라는 것으로 종결을 짓게 할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출생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거나 말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영은 인공생명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은 인간의 기능은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말은 '목숨'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있는데 영혼과 목숨은 동일한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영혼이라는 말이 문맥에 따라 목숨, 생명, 영혼 등으로 번역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여간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을 고려할 때에는 목숨이라는 것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죽는것이고 생물적 생명과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중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목숨도 일회적인 것이며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물적인 생명, 그것을 넘어서는 영혼, 인간 전체가 살아있고 지탱되고 있음을 대표하는 목숨, 하나님과 연계되는 영 등 다양한 생명 양태를 갖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들로 포함시킬 수 없는 새로운 면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말하면 인간은 그러한 생명 세계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게 해주시는 영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영생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이며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생은 날 때부터 생물적 생명이 주어질 때에 함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에 대한 논쟁이 있고 그것에 대한 논의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영생이 생물적 생명에 자동적으로 연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혼이 육신의 생명, 즉 생물적 생명과 갖는 관계와는 전혀 다른 면이 영생에 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은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빼놓고는 개인들에게는 고려할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한편 영생은 목숨이 있는 한 그것을 회생시키면서도 영원히 보존해야 하는 사명감과 함께 기대되는 것이다. 또 목숨은 영원히 보존될 때까지 죽어야 하는 요소이다. 목숨이 죽지 않으면 결코 영생하도록 보존할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이 목숨을 영생으로 바꾸라는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 목숨이 있는 동안 그것을 통해 영생을 얻도록 하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목숨은 생명으로서 죽는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목숨은 죽음으로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활을 하여 영생으로 대치된다.
영생은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독교에서 생명은 궁극적으로 영생과 그것을 얻는 길을 말하며 구원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작고 큰 모습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발견되지만 그것은 결코 영생이 아니며 목숨을 영생으로 바꿀수 없는 것들이다.
영생은 생물적인 생명이 있는 동안 믿음을 통해 얻어지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전제 아래 본다면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것이며 이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믿으며, 영생을 가진 자들이 들어가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게 된다.
생명의 영역
생명의 영역은 단순히 '이것이다' 라고 나룰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영역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생명은 자체와 관계를 갖는 모든 영역을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생명체의 영역과도 관계되며, 그렇게 관계된 영역에도 또 다시 관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은 구체적인 영역을 결정하기 보다는 그것을 보전하는 질적인 차원에 네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생명이 지탱되는 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의 근원을 밝혀야 하며 생명의 신비를 논의해야 하며 생명의 질과 성격을 결정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때에 갖는 그것의 성격을 지켜야 하며 그것을 변질시킬수 없는 위치에 있다.
둘째로 생명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같은 생명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갖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명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하며 개체의 관계에서 또는 공동으로 작용하면서 생명의 의미를 나타내야 한다. 또 생명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장기를 기증할 수도 있고, 그것의 기능이 정지된다고 했을때에 시신을 기증할 수도 있게 되며, 어렵기는 하지만 뇌사의 문제, 장기 이식의 문제, 인공지능의 문제, 유전공학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셋째로 생명은 환경과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것이 지탱되는 구체적인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은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특히 자연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위적 환경은 그것을 형성하는 데서 논의 되지만 자연환경은 그것을 보전하는 데서 인간의 생명과 연계된다. 자연환경은 인간의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생명과 직접적으로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생명의 중요함과 그 연계성을 배우게 하며, 자연환경이 없이는 인간의 생물적이고 물리적인 생명을 생각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생명이 자연환경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환경과 관계를 가지며, 환경속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뗄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넷째로 생명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영생하도록 보존될 때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영생을 갖는 사람만이 들어가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림과 같이 감상만 하는 나라가 아니고 영생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에 비추어 생명은 지탱되어야 하고 삶의 모습을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삶이 곧 우리의 삶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생물적인 생명을 넘어서서 영생하도록 연장시키는 현실이며 그것을 위해 우리가 목숨을 바치게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