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기록된 최초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더럽고 추한 이야기, 침울한 이야기, 어두운 이야기이다.
왜 나는 내가 가인과 아벨 둘 중의 하나의 후손이라고 믿어야만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사람은 영원한 라이벌, 원수지간의 가문 가운데 한 쪽에서 태어나는 비운을 지닌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사라에게는 하갈이 있고, 레아에게는 라헬이 있고, 한나에게는 브닌나가 있고,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 있고, 야곱에게는 에서가 있고, 예레미야에게는 바스훌이 있다, 로미오 가문에게는 줄리엣 가문이 있고, 옥스퍼드에게는 캠브리지가 있고, 연대에게는 고대가 있고, 한국에게는 일본이 있고, 프랑스에게는 독일이 있다~~. 그리고 평생 누군가를 적대시하고 원수처럼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됨의 불행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세 번째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창 4:25)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이 사실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마 나는 셋의 자손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6.25와 같은 불행한 전쟁에서 형제가 형제를,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죽이는 이야기들이다.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의 형제’를 살인하는 것이다. 물론 본문 안에 그러한 도덕적 결론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결론을 내린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이유로 그 이야기를 읽겠는가?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결국 자기의 형제를 죽이는 것이다. 미워하는 자는 누구든지 결국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바로 이 말속에,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형제를 지키는 자”라는 성경적 가르침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말의 이면에는 “당신은 당신의 형제를 지키는 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음을 가리킨다. 인류적 공동체의식을 가진 사람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는가?”(창 4:9)라고 물으셨다. 그때 가인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몰랐습니다”("Lo yadati")라고 대답하면서 마침표가 붙는다. 그 다음에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묻는 말이 나온다.
“나는 모릅니다” 끝에 나오는 마침표를 제거해보자. 히브리어에는 물음표나 마침표와 같은 것이 없다. 어디에서 한 문장이 마치는지는 해석의 문제이다. “나는 모릅니다”라는 문장 끝에 나오는 마침표를 제거하면, 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된다. “나는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 이글은 백석대학교 기독전문대학원 류호준 원장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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