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유물론에 입각한 주장일는지는 몰라도 공급받는 물질과 에너지가 양질일 때, 기계나 사람도 양질을 유지한다.
썩은 고기를 먹은 사람은 설사를 하고, 옥탄가가 낮은 휘발유를 주입받은 자동차 엔진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기라는 에너지를 받아서 돌아가는 자동화된 기계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태양열 전지로 작동하는 노트북 컴퓨터를 갖고 아마존의 정글에서 작업하는 미국인 인류학자를 부러워한다.
그 물건이 미제라거나 근사해 보여서가 아니라 공급받는 전력이 양질이기 때문이다. 전깃줄을 타고 흘러오는 전기에도 악질이 있고 양질이 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악질에서 양질로 변해온 격세지감의 전기 역사를 경험하였다.
시간제로 전기를 공급받기도 했고, 들어온 전기도 깜박거리는 일이 잦았다.
요사이도 베남 농촌이나 카자흐스탄 유목지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제 공급이나 깜박 전등을 볼 수 있고, 나의 컴퓨터는 죽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서울대학에 대한 불만이 쏟아진다.
왜 합격자 발표를 늦게 하느냐는 질타다. 입시철마다 장기간 감금 동원되는 교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학을 위한 변명이 아니라, 이제는 그 이유에 대해 순순히 수긍할 수 있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아서 한마디한다.
서울대학이 다른 대학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철저한 입시관리다. 고등학교에서 보낸 내신등급을 전부 새로 계산한다.
모 고등학교에서 한 명의 학생이 서울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는 경우라도 그 학생과 동학년생 전원의 성적을 자료로 받는다.
계산을 다시 하여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잘못된 문제점들을 발견해낸다.
고등학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풍토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번거로운 작업을 다 한다.
풍토가 그렇게 양질이지 못하다는 물증이 나온다. 대학에서 OMR 카드를 관리하던 시절에는 더더욱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한국 전력이 양질이 아니어서 카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계가 읽은 카드를 손으로 한 장 한 장 재검표하는 절차를 밟았다.
티끌이 붙은 칸을 답으로 읽게 되거나 희미하게 표시한 답안을 읽어내지 못해서 정답을 오답으로 처리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기계에만 의존하면서 소수점 두 자리까지 계산해내는 현재의 수능 성적발표에 대해서 내가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데는 이렇게 경험적인 이유가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한 손아귀에 쥔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수작업 시비와 보조개표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다.
그것이 불법이라는 판정이 나긴 했지만, 자동화된 기계가 놓친 인간의 의도를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졌고, 유권자의 의지를 확인하는 최선의 절차는 가장 원시적인 수작업이라는 점도 확인되었다.
대량생산과 복제를 기계화와 자동화가 선도한 20세기는 인간의 의도를 읽는다는 점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논증한 사건이다.
가장 원시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다.
사람이 최후로 믿을 수 있는 것은 구석기시대의 돌도끼를 제작했던 손과 눈이 교감한 힘이라는 점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자동화된 기계에 매몰된 인간을 재발견하는 과정이 21세기의 숙제라는 화두를 인류에 던져주었다는 상징적 함의로 충만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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