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와 진리

예수 안에는 생명이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2004. 5. 18. 13:39

설꽃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이렇게 말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 요한일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생명의 말씀'이란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자신에게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나누어주는 말씀을 말한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셋째 날에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하시니 생명 없는 땅이 식물을 냈다. 

 어떻게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오는가? 

 생명 없는 땅에 생명의 말씀이 함께 하시니 생명체인 풀과 나무를 낸 것이다. 

생명 없는 물에 생명의 말씀이 함께 하시니 물에 생명 있는 물고기들로 번성케 된 것이다. 

이처럼 생명의 말씀은 창세기 1장에도 이미 있었고 그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가라사대' 즉 '말씀하시기를'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보이지 않던 생명의 말씀이 눈에 보이게, 느낄 수 없던 생명의 말씀이 느껴지게 우리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요한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곧 생명이시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다.
아버지는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 아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누구든 그와 접촉하기만 하면 살아났다.

아니 그 음성만 들어도 살아났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4)이 살아났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41)이 살아났다.

그뿐인가?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시니 그 음성을 듣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다(요 11:44). 문둥병자, 혈루증, 간질, 중풍,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혈기 마른 자, 귀신 들린 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음성만 들으면 살아났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은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이 죽은 줄 알면 그는 산 사람이지 죽은 사람이 아니다.

육신이 죽은 사람이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나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줄을 알지 못한다.
또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생명의 주님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아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주님이 열어두신 구원의 날에 주님 앞에 나와 그의 음성 듣기를 거절하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