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1-32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사람 아담의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족보는 남자와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왕적 존재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2절). 그리고 곧 이어“아담은 자기 모양과 꼭 같은 아들을 낳았다”(3절)는 말이 첨가됩니다.“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닮는 대신에 그의 일그러지고 왜곡된 첫 사람 아담의 모습을 닮아서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완곡한 비판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족보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합니다. 먼저 족보에는 모두 열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열 명이라는 것은 인류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의 열이란 숫자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족보를 차근하게 읽어보신 분이라면 다음과 같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것입니다.“낳고-살고-죽다”는 패턴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고 살고, 그리고 죽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삼각 사이클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죽음이 항상 마지막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도, 천하장사도 영웅호걸도 모두 죽을 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유식한 자도 무식한 자도,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죽을 것입니다(참고, 시 49장). 죽음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류가 직면해야할 형벌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명령을 가볍게 여긴 최초의 조상들에게“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장례식장이나 영안실을 가보면서도 왜 사람들은 죽음이 마치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죽음의 실재성을 쉽게 잊어버릴까? 머리가 나빠서 잊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에 대해 기억한다는 것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일부러 잊고 살려고 하는 것일까?
물론“낳고-살고-죽다”는 불변의 기본음조 안에는 변주곡이 있습니다. 첫 자녀를 낳은 나이가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이 세상에 산 햇수가 다를 것이고, 죽은 나이 역시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후렴구는 계속 들려옵니다.“낳고-살고-죽다!” 인생은 네 박자가 아니라 세 박자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인가? 이 무서운 현실에 대해 성경은 희망의 빛을 던져줍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은 에녹의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21-24절). 에녹은 한 평생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시자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그가 승천(昇天)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것이 죽음 너머로 열려진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65년을 살았던 에녹, 아마 이 숫자는 “온 생애”를 하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웃고 울고 일하고 놀고 했던 그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숫자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죽음 너머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걷는 것이 너무 힘들거나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험할 때, 아마 그분은 여러분을 등에 업고 가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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